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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교육부장관을 지낸 이돈희 전 서울대 교수가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은 지금 생각해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쩌면 대학총장이나 장관을 지낸 분이 교장이 아니라 평교사로 교단에 선다면 더 큰 박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걸 보고서 장관이 어떤 자린데, 총장이 어떤 자린데 교장이나 교사로 갈 수 있는가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에 장관도 아니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국무총리를 지낸 분들이 다시 국회의원 해보겠다고 출마하고 설상가상으로 낙선까지 한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민주주의 시대에 총리하다가 국회의원 못할 것은 없지만 이돈희 교수의 변신처럼 박수를 받을 일은 아니다. 적어도 '총리'라는 자리의 권위를 깎아내렸다는 비판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정치사에는 이 같은 처신을 보여준 전(前) 총리들이 몇분 있다.
그런데 퇴임 후 처신 못지않게 재임 시의 처신도 공직의 존엄을 지키는 데 중요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자학하듯 모독해대는 한 전직 대통령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더니 그분은 퇴임 후에도 '대통령'이란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다.
그런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것 자체가 불행의 씨앗이었을까? 이른바 '죽도 밥도 아닌 것'처럼 돼가는 노무현-박연차-천신일 사건 수사를 두고서 임채진 검찰총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너무 이쪽저쪽 눈치를 살피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임 총장이 검찰총장이라는 공직을 모독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이번 사안을 잘 들여다보면 이쪽저쪽 눈치 살피며 구속이냐 불구속이냐를 오가는 듯한 임 총장의 '성격'이 아니라 임 총장의 '태생적 한계'가 문제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그의 고민은 전직 대통령을 구속할 것이냐 불구속할 것이냐의 선택보다는 '전직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는 엄연한 사실로 인해 더 깊은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정권이 바뀌었으니 전(前) 정권에서 임명된 총장이 물러가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주제넘게 현직 검찰총장에게 물러나라고 권할 생각도 없다. 그저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인 임 총장이 어떤 행보를 보였더라면 '공직모독'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를 되짚어보고 싶을 뿐이다.
아마도 박연차 게이트가 직접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까지 번지지만 않았다면 임 총장은 무난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발변수가 생겼다. 자신을 임명해준 전직 대통령이 수사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몇십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만큼 드문 일이다.
돌이켜 보면 검찰총장이라는 공직이 갖는 무게를 보여줄 수 있는 시점은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때 임 총장이 "나를 임명해준 전직 대통령을 나는 수사할 수 없다. 적어도 임명직 공직을 맡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도리이다"라며 물러났더라면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검찰총장이라는 대한민국의 대표 공직 하나는 더욱 권위를 갖게 되지 않았을까?
유감스럽게도 그 순간 임 총장은 필자의 다분히 낭만적인 기대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 후 상황은 묘하게 굴러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구속논란 이후 갑자기 현직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후원자였던 천신일씨의 이름이 박연차씨와 얽혀 빈번하게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안다. '죽은 권력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검찰이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 어쩌겠는가?'
앞으로 남은 일이야 임 총장이 잘 알아서 할 일이지만 이것 하나만은 지적해두고 싶다. 임 총장이 훗날 공직모독을 했다는 비판은 받지 않았으면 하는 충심에서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공직(公職)이 죽고 사는 원칙은 하나다. 해당 공직을 맡은 사람이 멸공봉사(滅公奉私)하면 그 공직은 죽고 선공후사(先公後私)하면 그 공직은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