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 위기의 바닥이 오고 있다는 신호가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위기가 끝난 후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한마디로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가일층 다원화된 지구 공동체로 변모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미국이 자초한 것이다.

    부시 정부의 8년 동안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도덕적·경제적·정치적 힘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대량살상무기가 없는 이라크를 침공하였고, 교토기후협약을 파기하고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고문 등을 자행하면서 미국은 자신이 자랑하던 도덕적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미국의 경제적 리더십은 사실상 금이 간 상태에 있다. 미국은 자신들이 오늘날 세계 경제 위기를 가져온 발원지라는 사실과 신자유주의를 금융 부문에까지 거의 무제한 허용했던 것이 문제의 원천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온 국민이 빚에 의존하여 영위해 온 소비 지상주의적 삶의 형태가 엄청난 거품을 창출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세계 최하위의 저축률과 세계 최대의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는 모두 이런 '거품적' 삶의 형태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들이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오바마 대통령이다. 오바마는 끝없이 빚의 향연을 벌여온 이 국민적 습관, 그리고 투자은행들이 벌인 탐욕과 거품의 행태를 고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미국의 경제는 많이 변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미국 국민은 과거보다 덜 쓰고 더 많이 저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투자은행들의 활동은 규제의 틀 속에 묶임으로써 상당히 축소될 것이다. 저축의 증대와 투자은행의 위축은 돈의 유통 속도를 줄임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였던 미국 경제의 활력을 많이 앗아가게 될 것이다. 자연히 미국이 더 이상 세계의 모든 상품을 거의 무제한 빨아들이는 블랙홀의 역할을 하기가 어렵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은 미국의 국채를 무려 3조달러나 움켜쥐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채무국이며 계속되는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는 전 세계가 미국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주지 않으면 더 지탱할 수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만들어 놓았다. 한마디로 미국은 자신이 더 이상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며, 또 세계를 리드하는 지도국의 역할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미국이 상실한 힘의 공백의 대부분을 중국이 채우고 있다. 우리나라 GDP의 2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외환보유고가 행사할 수 있는 그 막강한 경제적 힘은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핵무기의 힘을 상쇄할 만큼 강력한 정치적 힘을 중국에 부여하였다.

    이번 런던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은 바로 이 새로운 파워 다이나믹스를 너무나 명백히 보여 주었다. 오바마는 더 이상 리더가 아니었고 조정자(coordinator)였다. 러시아·인도·브라질 등이 가진 강력한 경제력은 힘의 균형을 구미를 중심으로 한 올드 월드에서 새로운 월드로 옮기고 있다.

    이번 경제 위기는 또 세계가 진정 공동운명체가 되었음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세계 GDP의 80%, 인구의 66%, 교역량의 90%를 차지하는 G20이 세계의 운명을 같이 의논하고 결정하는 모습은 다원화된 새로운 세계의 장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세계는 진정한 의미의 다원화된 지구촌으로 탄생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다원화된 세계를 위해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