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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에 이 신문 박제균 영상뉴스팀장이 쓴 '배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나는 (범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수해야 한다.” “구속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큰소리치던 그는 자수하지도, 구속되지도 않았다. 최근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북한까지 다녀왔다.
그의 폭로로 촉발된 삼성 특검으로 삼성그룹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키워낸 이건희 전 회장은 현직에서 물러났을 뿐 아니라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았다. ‘글로벌 삼성’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됐다. 삼성은 숨을 죽이며 10일 열리는 항소심 선고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삼성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해 검찰 재정경제부 국세청을 관리했다’며 스스로 떡값 배달에 관여했다는 김용철 변호사는 지금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의 삼성 관련 폭로가 ‘삼성의 투명성을 높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가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는….
김용철 씨는 1997년부터 2004년 8월까지 7년간 삼성 법무팀에 있으면서 연봉과 성과급, 스톡옵션 등으로 모두 102억 원을 받았다. 퇴직 후에도 지난해 9월까지 3년간 고문료 명목으로 매달 2200만 원씩, 8억 원가량을 받았다. 2005년 9월부터 한겨레신문 비상근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도 꼬박꼬박 삼성으로부터 고문료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10월 고문료가 끊어지자 그달 말에 삼성 비자금 조성의혹을 폭로했다. 그가 진정한 ‘내부 고발자(Whistle blower)’가 되려면 한 해 평균 15억 원을 받던 삼성 법무팀 시절이나, 적어도 고문료를 받던 때 폭로했어야 했다. 고문료가 끊어지자마자 ‘등에 칼을 꽂는’ 처사는 누가 봐도 비겁하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사회정의 구현에 앞서 김용철이라는 개인에게도 인간세상의 정의가 구현됐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2003년 낙하산을 타고 KBS에 착륙한 정연주 전 사장은 재임 5년여 동안 부실경영과 인사전횡, 편파보도 책임, 배임의혹, 아들의 병역면제의혹에 대한 말 바꾸기 등으로 오욕을 뒤집어썼다. 그러고도 올해 1월 노조 간부와 만나 “나를 건드리면 모든 일을 할 것”이라며 “퇴진 압력을 넣으면 회사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회사 비리 폭로’는 통상 노사가 극한 대립하는 경우 노조가 사측을 압박할 때 쓰는 메뉴다. 사장이 노조에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황당하다.
더구나 5년 가까이 사장을 하면서 경영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남의 회사 얘기하듯 ‘회사 비리’ 운운한 걸 보면…. 5년간 거대 공기업의 사장으로 누릴 대로 누리다가 퇴진 압력에 몰리자 자기 조직을 배신하려는 행태는 김용철 씨와 매우 닮았다.
하기야 호남표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분도 ‘호남표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맞는 얘기일 수 있지만, 적어도 민주당에 부정적 이미지를 잔뜩 심어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것도 대통령을 물러난 뒤 비수를 찌르듯 할 말은 아니다.
자기가 속했던 조직에서 갖은 혜택을 누린 뒤 ‘비리 폭로’ 운운하는 사람은 사회정의를 세우기는커녕 인간세(人間世)를 피폐하게 만든다.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형평을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고발자의 양심불량으로 저울이 기우뚱거리면 칼을 휘둘러도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