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에 이 신문 홍찬식 논설위원이 쓴 '교육 피로증'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지난번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진영이 내건 구호다. 공부는 이제 지겨우니까 앞으로는 쉬어가며 하자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슬로건이었다. 세상에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몸살을 앓는 아이들은 없다. 학생들은 늘 놀려고 하며, 공부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마련이다. 좌파든 우파든 교육감의 기본 책무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교육감 말고 다른 선거에 나가면 된다. 정치가가 돼 학생들이 공부 안 해도 평생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주면 될 것이다. 적어도 교육감을 하겠다는 사람이 ‘잠 좀 자자’며 학생들을 꼬드겨서는 안 된다.

    ‘잠 좀 자자’가 먹히는 이상 징후

    이런 후보가 지난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공부를 열심히 시키겠다’는 후보와 맞붙어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아니 내용적으론 승리였다. ‘학력 신장’을 주장한 후보는 현직 교육감임에도 불구하고 시종 고전하다가 막판에 기사회생했다. 진보 진영이 거의 필사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던 점을 감안해도 납득하기 힘든 결과였다. 서울시민 정서에 복잡하고 미묘한 변화가 읽혀진다.

    사실 현 정부가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내놓은 영어 공교육 확대 방침만 해도 그토록 몰매 맞을 정책은 아니었다. 정보가 빠르거나 있는 집 아이들은 벌써 영어 몰입교육을 받고 있다. 그 혜택을 확대하겠다는 방향에 잘못은 없다. 문제는 사교육비라는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영어 공교육이 확대되면 그에 따른 사교육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서울시교육감 당선자가 내건 교육경쟁력 강화 공약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사교육비를 증가시킬 것이라는 반응이 적지 않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더구나 사교육은 “다른 집들이 다 하기 때문에 안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학부모가 많다. 즉 사교육으로 얻어지는 실제 효과보다는 심리적 불안감이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잠 좀 자자’는 말에 솔깃해지는 것이다. 현재도 사교육비 부담이 한계점에 다다른 상황에서 교육에 대한 집단적 피로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주도면밀하게 대응해야 한다.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교육정책임을 설득하면서 필요한 것은 소신 있게 밀고 나가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하다. 최근 발표된 교육과학기술부의 학교정보 공개 방침만 해도 ‘우수 학력(상위 20%)’ ‘보통 학력(상위 20∼50%)’ ‘기초 학력(50∼80%)’ ‘기초 학력 미달(80% 이하)’ 4개 등급 가운데 ‘우수 등급’을 제외하고 3개 등급으로 축소해 공개하겠다고 한다. 서울시에 설립되는 2개의 국제중학교 역시 추첨으로 학생을 선발한다고 한다. 하겠다는 말을 해 놓았으니 안 할 수는 없고 마지못해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다.

    정부, 국민에 확실한 믿음 심어줘야

    교육정책에서 수월성과 평등의 가치는 모두 존중돼야 한다. 그렇다고 이쪽저쪽 눈치 보며 두 정책을 적당히 얼버무려서는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전국의 학교별 성적을 공개하려면 정확하게 해야지 알 듯 모를 듯 하는 게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조기유학을 가는 행렬이 한 해 3만 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그 수요를 국내로 돌리겠다며 고작 정원 320명인 국제중학교를 만들어 놓고 몸을 사리는 것은 소심함의 극치다.

    건국 60년 만에 한국이 지금 수준까지 온 것은 억척스럽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교육의 힘이었다. 거의 하나뿐인 성장동력에 이상신호가 감지되고 있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이 사교육비를 줄이고 교육의 질을 높일 것이라는 확신을 국민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경쟁은 괴로운 일이지만 교육에선 불가피하다. 포퓰리즘과의 적당한 거래는 교육에 치명적인 독(毒)이라는 점을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