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쓴 '통미봉남을 환영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고 그것을 미국의 텔레비전이 현장에서 생중계한다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데 그 이상 효과적인 수단이 없을 것이다. 네오콘(신보수파)이 대북정책을 좌지우지하던 조지 부시 1기 정부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런 일이 현실로 전개되는 것이 시간문제로 보인다. 26일 정부 고위소식통은 북한과 미국이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고 그것과 병행해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 이름을 빼는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말했다. 핵 불능화 조치는 사실상 끝났다. 냉각탑 폭파는 북한 입장에서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부시 정부 입장에서는 국내의 보수·강경 파를 향해 전시효과를 노린 일종의 쇼다. 불능화보다 더 큰 장애물은 핵신고에 북한의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개발 프로그램과 시리아에 대한 핵물질·핵기술 수출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였다. 그러나 시리아의 핵시설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파괴해 버렸기 때문에 큰 쟁점이 되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농축우라늄 부분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지난달 김계관과 크리스토퍼 힐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잠정 합의를 했다.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에 대해 적성국 교역법과 수출통제법을 적용, 북한과의 무역과 금융 거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 오늘까지 왔다. 미국은 또 87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미국의 이런 강도 높은 제재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크게 제한당했다. 북한이 오매불망(寤寐不忘) 바라는 것은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과 적성국 교역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지난해 1월 베를린의 북·미 간 첫 직접대화에서 핵포기와 테러지원국 해제를 병행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 이번에 그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이다.

    북·미 대화가 여기까지 진전되자 한국에서는 또 통미봉남(通美封南)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명박 정부 등장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는데 북한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에 가속이 붙으면 한국은 왕따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걱정도 팔자다. 한국이 누구로부터 어떻게 고립된다는 것인가. 우리가 심각하게 걱정하는 사태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동시에 교착상태에 빠지고 그 틈에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진전시키는 것이다. 북한은 남북 관계가 훈풍일 때 미국을 직접 협상으로 끌어내기 위해 핵실험을 강행해 뜻을 이뤘다.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적용 중단을 넘어 북·미 관계 정상화가 줄 정치·경제적 노다지가 시야에 들어왔는데 북한이 6자회담 합의와 북·미 간 합의에 배치되는 행동을 취하겠는가.

    75년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중국과 소련이 남한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는 교차승인을 제안했다. 90년대 초 한국은 중국·러시아와 수교했다. 그러나 북·미, 북·일 수교는 아직도 실현되지않고 있다. 93년 김영삼 정부는 미국에 한국 눈치보지 말고 북한과 관계 개선하라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도 그랬다. 노무현 정부는 남북 관계는 북·미 관계 진전의 반걸음 뒤를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그런 우리가 북·미 협상으로 핵문제가 풀릴 기미를 보인다고 통미봉남을 걱정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고 근시안적이다. 오히려 미국과 일본의 등을 떠밀어 북한과의 관계를 하루빨리 개선 또는 정상화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는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선공약 말고는 포괄적인 대북정책이 없다. 그런 배경에서 대북 식량지원에 대해 통일부와 외교부의 말이 다르고, 합참의장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언급했다. 한·미 관계가 건강하면 통미봉남이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북한이 그런 전략을 취한들 남한이 잃을 것이 무엇인가. 북한에 식량을 주는 조건은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다는 인도적 입장과 비핵화 프로세스를 밀어주는 선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결정하면 된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 대통령의 4강 순방이 끝난 뒤 전체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다. 북·미 관계가 진전될수록 통미봉남은 추상적 개념이 된다. 통미봉남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포괄적인 대북정책을 수립할 때까지 조용히 시간을 버는 데 활용하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