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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정치부 차장이 쓴 '현역 많이 자르면 개혁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주말 한나라당 정치신인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드디어 공천이 확정됐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MB 측근 리스트'에 자주 등장해 익숙해진 이름이었는데 빈말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 지역구에서 3배수 압축까지 경쟁했던 한나라당 당직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변에선 "실세가 왔으니 딴 지역구를 찾아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까워 버텨 보겠다"고 했었다. 그 친구도 5년 전엔 대선후보의 남부럽지 않은 측근이었다. 새 물결에 밀려난 셈이다.
하긴 원외 당직자의 공천 탈락 스토리는 안줏감에도 못 끼는 요즘이다. 지역구 진출을 노리던 비례대표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구 현역들도 새 정권의 점지를 받은 신인에게 밀려 맥없이 나가떨어지고 있다.
끝내기 단계에 접어든 한나라당 공천의 주제어는 '역시나'이다. 지역구마다 대표적인 '친이(親李)'로 호가 난 사람은 어김없이 공천장을 챙겼다. 그보다 숫자는 훨씬 적지만 "저 사람까지 날리면 박근혜 전 대표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핵심 '친박(親朴)'들도 살아남고 있다. 반면 어정쩡하게 줄을 섰던 현역들은 이렇다 할 탈락사유 없이 칼바람을 맞고 있다. 다선(多選)에다 고령(高齡)이라는 '죄목'까지 겹쳤다면 군말 없이 사약을 받아야 한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과 특수관계가 있는 예외 케이스는 논외로 한 말이다.
한나라당 공천은 외부인사가 과반(6명)인 11명의 공천심사위원회가 결정한다. 이들이 어떤 외부압력도 없이 독립적으로 심사한다는데 어쩌면 그렇게 당내 역학관계가 정확하게 반영되는 결과가 나오는지 신기하다.
상승세를 타고 있는 정권엔 공천 희망자가 차고 넘치기 마련이다. 최우선적으로 챙겨줘야 할 대상은 정권 창출 과정에서 주군(主君) 주변에 있었던 공신들이다. 그 다음 순위는 그럴듯한 이력서를 쥔 신인들에게 전문가라는 상표를 달아 전략지역에 투입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공천장을 나눠주자면 평소 눈 밖에 났거나, 든든한 줄을 잡지 못한 현역들을 무더기로 쳐낼 수밖에 없다.
정권 핵심들은 이런 공천을 하면서 '개혁공천'이라는 홍보까지 한다. 현역의원들의 물갈이를 자기 팔다리를 잘라내는 행위에 빗대며 '개혁의 아픔'을 말한다. 평소 국회의원들을 못마땅해했던 국민들도 물갈이 폭이 커질수록 쾌감을 느끼며 박수까지 보낸다.
그러나 현역의원 물갈이를 개혁이라 불러줘도 좋은 것일까. 우선 '친이'가 "내 식구들도 많이 잘라냈다"고 생색을 내는 것은 눈속임일 뿐이다. '친이'든 '친박'이든 많이 쳐내고 나면 그 자리를 채울 새 금배지들은 모두 친이 코드로 복제된다. 또 친이 쪽에 섰다가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은 새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천 개의 공직 중 하나로 보상받게 마련이다.
썩은 물 대신 갈아 채우겠다는 새 물이 정말 신선한지도 따져 봐야 한다. 이번에 한나라당 공천을 따낸 '신인' 중엔 전 정권에서 이런저런 재미를 다 봐 놓고, 정권이 바뀌자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코드로 줄을 바꿔 단물 맛을 계속 보겠다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정말 궁금한 것은 누가, 무슨 근거로 개혁 공천장을 나눠줄 면허를 받았냐는 점이다. 동료의원들을 '어항 속 금붕어'로 아는지 40% 물갈이론(論)을 펴며 공천을 진두지휘하는 사람들의 정치권 이전 경력이나 정치권 입문 후 행적을 봐도 남다른 '개혁 성향'은 읽기 어렵다.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미래의 권력을 빨리 알아보고 그 주변에 일찍 자리를 잡았다는 공적일 것이다.
공천권이 권력으로부터의 거리 또는 권력의 필요에 따라 배분되는 정치현실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런 공천 흐름에 '개혁'이라는 포장지를 씌우겠다는 것은 낯 간지러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