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0일자 사설 '박근혜 전 대표가 가야 할 길'입니다.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 화합의 걸림돌이라는 이재오 최고위원을 사퇴시키고 박근혜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대구에서 열리는 필승결의대회 참석을 요청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참석을 거부했다고 한다. 박 전 대표 측은 이 전 최고위원이 사퇴 성명서에서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서도 “과대망상”이라고 비난했다.

    겉으로만 보면 박 전 대표는 경선 불복의 수순으로 들어간 듯하다. 이회창씨의 출마로 박 전 대표 지지층이 대거 이씨 지지층으로 옮겨가고 있는데도 박 전 대표는 소속 당 후보를 지지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침묵은 그 자체가 이회창씨에 대한 암묵적 지지로 해석될 가능성이 더 높다. 대구 출신인 박 전 대표가 대구에서 열리는 중요한 당 대회 참석을 거부한다는 것도 누가 보아도 당 후보에 등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 후보 측에서 계속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전 최고위원은 사퇴성명서 초안에 “당내 권력 투쟁 중단”과 같은 자극적인 말을 써서 기어이 상대방 속을 긁고야 말았다. 이 전 최고위원 사퇴 자체도 시기를 놓쳐 “속이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 마당인데 이런 일까지 겹쳤다. 이 후보와 박 전 대표 간의 무슨 일이든 결국 불화로 연결되는 것은 이 후보의 ‘진정성’이 박 전 대표에게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성은 勝者승자에만 요구되는 덕목은 아니다.

    박 전 대표의 침묵이 길어지자 일각에선 박 전 대표가 오는 17일 김경준 송환의 여파가 어떻게 되는지 기다리고 있다는 추측까지 나오고 있다. 이 후보가 타격을 받는 정도에 따라 대응을 달리할 것이라는 얘기다. 억측일 테지만, 시중에 파다한 얘기인 것도 사실이다.

    지금 박 전 대표가 바라봐야 할 것은 이 후보도 아니고, 이회창씨도 아니며 더욱이 김경준도 아니다. 박 전 대표는 국민을 보아야 한다. 박 전 대표는 경선 때보다 경선 패배 후에 영향력과 비중이 더 커졌다. 국민이 박 전 대표를 경선 후에 더 믿게 됐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지난 8월 20일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한 직후 연설을 통해 “오늘부터 저는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하겠다. 이 후보는 국민의 염원을 부디 명심해 정권 교체에 반드시 성공해달라. 저를 지지했던 분들도 그 순수한 마음으로 정권 창출을 위해 힘써달라. 꼭 부탁 드린다. 경선 때의 모든 일들을 이제 잊자. 하루아침에 안 되면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잊자”고 했다. 박 전 대표는 이 뭉클한 연설을 통해 국민 가슴 속에서 새로 태어났다. 박 전 대표는 국민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때 그 말 빚을 갚아야 한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어제 “박 전 대표는 고속도로를 역주행한다거나 갓길로 간다거나 하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 전 대표는 당의 지도자로서 이런 당과 당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사명도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런 책임과 사명의 차원을 떠나서도 正道정도가 사라진 이 선거판에서 정도가 완전히 실종된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