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강인선 논설위원이 쓴 '앨 고어도 억울해서 다시 한번?'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에도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재출마 가능성으로 정계를 긴장시키는 정치인이 있다. 앨 고어(Gore) 전 부통령이다. 고어는 2000년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패한 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지난 대선에 이어 올해도 재도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민주당의 힐러리 대세론을 위협하는 변수도 고어다. 고어는 재출마를 공식선언한 적이 없지만, ‘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한 적도 없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는 내년 1월 전까지 고어가 이 ‘마지막 유혹’에 굴복할 것인지 여부가 관심거리다.

    최근 민주당 지지자를 대상으로 한 CBS 방송 여론조사에서 고어를 후보군에 포함시켰을 때 힐러리 클린턴(Clinton) 상원의원이 37%의 지지를 얻어 1위, 고어가 32%로 2위였다. 한때 힐러리를 위협했던 버락 오바마(Obama) 상원의원은 16%로 3위였다. 고어가 빠진 조사에선 힐러리가 51%, 오바마가 27%였다.

    출마의사를 밝힌 적도 없는 고어가 2위를 하자 고어 지지자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고어 출마를 촉구하는 20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던 지지그룹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이전 참모들은 “출마선언만 하면 이틀 안에 후원금 1500만 달러를 거둬들이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장담하기까지 했다. 일부 여론조사 전문가는 고어가 재출마를 선언하는 즉시 힐러리 지지자 중 상당수가 고어 쪽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본선 패자가 재도전하는 사례가 드문 미국 대선에서 고어의 재출마가 논의될 수 있는 것은 2000년 대선의 억울한 패배에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주 재개표 소동으로 대법원이 개입해 승부가 결정된 점, 대중 지지에서 앞서고도 선거인단 득표수에서 진 것, 유권자 1억 명이 참여한 선거에서 단 537표 차이로 승부가 갈린 점 등 석연찮은 패배 이유가 고어 동정론의 근거다.

    게다가 고어는 유능한 정치인이다. 29세에 하원의원, 35세에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45세에는 부통령이 됐다. 시대를 앞서는 이슈를 잡아내는 감각도 탁월하다. 의원 시절엔 군축문제, 부통령 때는 인터넷에 집중했고, 최근엔 환경문제에 주력해 노벨상까지 탔다. 그러니 국가를 위해 대통령으로 한번 활용(?)할 만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고어 출마 반대·회의론자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우선 고어에겐 당연히 이겨야 할 싸움에서 패한 책임이 있다. 클린턴 집권 8년 동안 미국 경제는 일자리 2200만 개 창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주택보유율, 30년 만의 최저 실업률 등을 기록하며 호황을 경험했다. 반대자들은 이렇게 점수 딸 거리를 쌓아놓고도 부시와 접전을 벌인 건 전적으로 고어의 매력과 능력 부족이라고 본다.

    고어가 제 고향인 테네시주에서조차 부시에게 밀린 것도 무능의 또 다른 증거다. 더 큰 약점은 대중과의 교감능력 부족이다. 고어의 모범생 기질은 보통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지루한 데다 잘난 척한다’는 인상을 줬다. 노벨상까지 받은 후엔 대중과의 거리감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실패한 대선후보는 조용히 뒤로 물러앉는 것이 관례다. 국민과 당이 어렵게 한번 준 기회를 살리지 못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한 번 더’는 없다. 아무리 억울해도 패배는 패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월터 먼데일, 마이클 듀카키스, 밥 돌 등 최근 후보들이 다 그랬다. 새 시대와 새 인물을 위해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기회를 준 당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책임을 지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