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AI, 국가안보로 격상한 미국…'실리콘 패권' 전면전정규예산으로 판 키운 일본 "관료국가 집단전략 돌아왔다"멈추지 않는 중국 굴기, 제재 속에서도 '기술자립' 가속거꾸로 가는 한국…전력 핑계로 산단 이전론 꺼내는 무책임한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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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하이닉스 용인클러스터 전경.ⓒSK하이닉스
미국·일본·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을 둘러싼 기술 패권 경쟁에서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가운데, 한국만이 세계 흐름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글로벌 경쟁국들이 기술을 '국가안보'이자 '국운'의 문제로 다루는 동안, 한국에서는 핵심 산업의 입지를 정치 논리로 흔드는 발언이 정부 고위 인사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29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미·일·중 4개국은 국가 대항전을 방불케하는 반도체 패권전을 본격화하고 있다.우선 미국은 반도체를 '국가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이른바 '칩스법(CHIPS and Science Act)'이다. 칩스법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전략 법안으로 통한다.미국 정부는 이 법을 통해 첨단 반도체 공장을 자국 영토에 묶어두는 한편,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중국에서 첨단 공정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제한을 걸었다.이 과정에서 미국의 실리콘 밸리는 더 이상 민간 혁신의 상징이 아니라, 미국 패권을 떠받치는 전략 거점이 됐다.이것이 미국의 '팍스 실리카(Pax Silica)' 전략의 골자다. 과거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지배 질서를 의미하던 '팍스 로마나'를 떠올리게 하는 이 표현은, 반도체 기술을 기반으로 한 미국 중심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의미다.엔비디아가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며 미국 기술 패권의 상징적 존재로 떠올랐고, 미국 정부는 전력·용수·인허가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야 할 전략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일본 정부 역시 반도체 관련 예산을 대폭 늘리면서 반도체에 국운을 거는 모습이다.일본은 특히 기시다 후미오 내각 들어 반도체산업 육성에 집중하는 것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반도체와 AI를 단기 경기 부양 수단이 아닌 장기 국가 생존 전략으로 격상시킨 것이다.그러면서 2026회계연도 예산안에서 반도체·AI 지원 규모를 기존의 약 4배로 확대했고, 그동안의 추가경정예산 방식 대신 정규 예산에 상시 반영했다.일본 산업통상성의 예산은 전년 대비 50%가량 늘었으며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와 AI 연구개발, 데이터 인프라 구축에 집중 투입된다.특히 일본 정부가 전폭 지원하는 국책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는 일본식 '드림팀' 전략을 잘 보여준다. 정부, 대기업, 관료 조직이 하나의 목표 하에 움직이며 첨단 공정 국산화를 추진하는 것이다.일본 정치권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어디로 옮긴다거나, 전력이 부족하니 입지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찾아보기 어렵다. 국가 전략 앞에서 정치적 구호는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이다.중국 역시 시진핑 국가주석 체제 아래 '반도체 자립'으로의 가속을 멈추지 않고 있다.미국의 반도체 장비·기술 제재 속에서도 중국은 '중국제조 2025' 기조를 유지하며, 세계 최고의 성능을 당장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공급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미중 갈등이 격화할수록 중국의 기술 내재화 속도는 오히려 빨라지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
- ▲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연합뉴스
이와 정반대의 장면이 한국에서 연출되고 있다. 반도체 수출이 전체 수출의 약 3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26일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입주하면 두 기업에 필요한 전력이 원전 15기 분량"이라며 "지금이라도 전기가 많은 지역으로 옮길 필요가 있는지 고민이 있다"고 발언했다.전력 공급 대책을 마련해야 할 에너지 주무부처 장관이, 문제 해결 방안이 아니라 산업단지 이전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이 발언은 개인 의견을 넘어 이재명 정부의 산업 인식 수준을 드러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백조 원을 투입해 착공에 들어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수년간 인허가 지연과 행정 혼선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치명적인 '시간' 자원을 잃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권 일부 정치인들은 '지역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새만금 이전론을 띄우고 있고, 김성환 장관의 발언은 이 같은 정치 논리에 힘을 실어준 모양새다.반도체 산업은 전력, 용수, 인력, 협력업체, 연구 인프라가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초고도 집적 산업이다. 수도권에 클러스터가 형성된 것은 특혜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의 결과다. 이를 무시한 채 입지를 흔드는 것은 산업 경쟁력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정이라는 지적이 전문가들 가운데서도 나온다.미국은 반도체의 원료 실리콘으로 패권을 설계하고, 일본은 관료 국가의 조직력으로 드림팀을 구성하며, 중국은 제재를 자립의 연료로 삼고 있다. 그 사이 한국은 장관 한 사람의 발언으로 국가 핵심 산업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