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과 교수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자 검증 2라운드를 예고하는 각종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많은 후보’(이해찬), ‘후보가 된 것을 후회할 정도로 혹독한 정책검증에 돌입할 것이다’(노회찬), ‘기다려온 쉬운 후보’(정동영), ‘이 후보의 실체를 철저히 파헤칠 것’(손학규). 빈말이라도 적에게 덕담을 건넬 정도의 여유로운 품성을 우리 정치인들에게서 기대한 바도 없지만, 자신들도 검증받아야 할 처지에 판관 행세를 하는 모양새를 보니, 앞으로 얼마나 더 진흙탕 레슬링을 지켜봐야 할지 걱정이다.

    미국의 한 논쟁 교재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어떤 이가 명민한 변호사에게 물었다. “당신이 유능한 변호사라는데, 그 증거를 보여주시오.”그러자 변호사가 답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사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유능한 변호사답게 그는 자기에게 온 ‘증거 제시의 부담’을 슬쩍 상대방에게 떠안김으로써 애써 증명해야 할 처지를 모면했을 뿐 아니라 ‘자동적으로’ 유능한 변호사 자리를 유지했다. 이 일화는 누가 증거 제시의 부담을 지는가에 따라 논쟁의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예시이다.

    한데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증거가 존재해야 하고, 증거의 수집 절차가 정당해야 한다. 그리고 입증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무죄가 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또 검증의 주체는 사안과 이해상충이 없고, 진실 여부에 관심이 있는 제삼자여야 한다. 검증의 과실(果實)에 욕심이 있거나 직접 수혜 대상인 사람들은 상대방을 검증할 자격이 없다.

    위의 전제에 공감한다면 그동안 지켜본 한나라당의 검증 게임이 얼마나 엉터리였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유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했고, 증거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의혹’ 수준의 증언들을 증거인 양 취급했으며, 증거의 수집 및 유통 과정이 불미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검증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검증의 열매에 눈먼 이해 당사자들이었다. 게다가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양팔 저울의 한쪽에 불과한 검찰이 실체적 진실의 최종 규명자인 양 검증 무대에 오르내렸다. 이쯤 되면 ‘검증’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그냥 ‘이명박 때리기’, 혹은 ‘박근혜 들추기’로 부르는 편이 옳아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혼전(混戰)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진흙 속에도 간혹 반짝이는 사금파리가 섞여 있듯이, 이 와중에도 쓸 만한 메시지를 찾아낼 수는 있다. 우선 이 후보는 자신을 향한 검증공세가 그동안 고도성장을 주도하면서 정작 나눔에는 인색했던 자본가 그룹 전체의 ‘지위의 도덕성’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본선 게임의 본질이 될지 모르는 이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 이슈로 받아들여 억울해하거나 자기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해서는 2라운드 검증의 파고(波高)를 넘기 힘들다. 이 후보는 분배철학과 의지가 담긴 정책을 공들여 만들어 분배 정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려야 한다.

    퍼즐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기타 후보들은 박근혜 전 대표의 패인 중 하나가 지독한 네거티브전이었다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네거티브로 상대방 지지자를 떨어뜨릴 수는 있지만, 그들을 자기편으로 불러 모으지는 못한다. 네거티브라는 나무에서 열린 과실은 쓰고 독해서 아무도 입에 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범여권 후보들은 대체 왜 많은 국민이 등 돌리고 있는 지금의 정권을 지속하려 하는지 납득시켜야 한다. 현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진보정권에 대한 철학과 집권 후 청사진을 열심히 알려야 한다. 그러기엔 시간이 빠듯하다. 어쭙잖은 재판관 놀이나 변호사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버릴 때가 아니다. 후보조차 정해지지 않은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불과 석 달 남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