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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회당의 이론가이자 미테랑 대통령의 보좌관을 지낸 자크 아탈리(Jacqes Attali)는 몇 년 전 펴낸 『인간적인 길』이라는 책에서, “정당 내부에서 벌어지는 정치 지도자들 사이의 하찮은 싸움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처한 중대한 위험에 대한 대응,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연관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후자가 불러일으키는 위기의식을 전자가 희석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자크 아탈리는 사회민주주의의 시각에서 서구 정당 정치의 반(反)대중성 혹은 무책임성에 대한 질타를 하는 것이지만, 그가 전개하는 이론적 맥락이 오히려 한국의 정치 현실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이 처한 현실을 ‘위험’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국민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서민들의 생활 조건은 위기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 이런 위기를 타개하는 데 앞장서야 할 제도 정치는 자신들의 밥 그릇 챙기기와 권력 투쟁에 더 열중이며, 민생의 문제보다는 정치권의 사소한 가십이 언론 매체에 대서특필되도록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 대한민국의 중요한 과제들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컨대 국민의 생활 세계와 제도 정치가 완전히 분리되는 현상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금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의 조기 과열이야말로 국민 대중의 위기 상황을 은폐하고 있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여권은 어떤 간판을 내세워야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지 골몰할 뿐, 자신들 때문에 피멍이 든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래서 매일 삼삼오오 모여서 하는 일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탈당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후보와 연을 맺을 것인가로 날을 지새우고 있다. 여당으로서 져야 할 국정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마저 팽개친 지 오래되었다.
국민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아 온 한나라당은 지나치게 높은 지지율에 넋을 잃어서인지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데 편할 날이 없다. 그래서 쇼킹한 사냥감을 찾고 있는 언론에 연일 뉴스 원을 공급해 주고 있다. 그러자 그 동안 집안 싸움으로 지쳐 있던 여권이 이제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인지 한나라당 후보들에 대한 공격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입장에서는 이 무차별적인 입체전이 마냥 싫지가 않다. 국가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지만, 우선 재미가 있고,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정리될지 쉽게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흥미진진한 드라마 자체이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싸움과 그로 인한 국가 에너지의 낭비를 초래하는 데 있어 노무현 대통령의 공로도 작은 편이 아니다. 연초부터 제기한 헌법 개정안 발의, 또 최근의 기자실 통·폐합 문제 모두가 국민들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들이다. 물론 거기에 지나치게 대응한 언론의 보도 태도 역시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원인 제공을 누가 했든 이런 현상 자체가 한국의 권력 집단들이 얼마나 반(反)국민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권력자들 사이의 자존심 싸움으로 국민들만 피해를 보는 것이다.
지금 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힘들게 살고 있다. 불안한 일자리와 잠자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교육비, 빈곤의 대물림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 등, 살얼음판을 걸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어느 정치 세력이 국민의 희망이 되고 있는가? 국민들은 이미 실패했다고 확인했음에도 자신만은 ‘세계적 대통령’으로 착각하는 현직 대통령, 대통령과 함께 국정 실패의 무한 책임을 져야 함에도 낡은 논리와 정치 공작으로 정권을 계속 장악하려는 열린우리당, 실패한 정권을 대신해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함에도 내분으로 스스로 그 기회를 놓치고 있는 한나라당, 그 누구에게 기대를 걸 수 있겠는가?
거창한 구호보다는 실천 가능한 약속을 하는 정당과 지도자,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정당과 지도자, 작은 것을 버림으로써 큰 것을 얻는 정당과 지도자,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닌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정당과 지도자는 없는가? 이제 또 다시 ‘차악(次惡)’의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망한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말했다. “위기는, 과거의 것이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그 상황을 말한다”라고. 한나라당이 새로운 대안이면 좋으련만…. 4.25 재·보선에서 우리 국민들이 한나라당에게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건만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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