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박광주 논설위원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제주도 내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 쉬이 수그러들지 않을 모양새다. 김태환 제주지사가 군당국의 해군기지 건설계획 수용을 전격 발표한 14일 이후의 상황을 지켜보면 얼마나 더 소모적인 갈등을 감내해야 할지 걱정스럽다.
김 지사의 결정은 국익을 위한 지극히 당연하고도 옳은 선택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사실상 있을 수 없다. 군당국이 새 해군기지 건설의 최적지로 제주도 남단 지역을 지목한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21세기 해양안보를 위한 신중한 전략적 판단의 결과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제주도 남방해역은 원유를 비롯한 대한민국 수출입 물량 99%의 수송이 이뤄지는 핵심 해상로다. 이 해역이 15일 정도만 봉쇄되면 국가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양진출의 교두보 마련 차원을 떠나 불순세력의 해상로 봉쇄책동에 맞서 해군의 기동성을 극대화할 요충지로 제주도 남단이 꼽힌다. 초동조치가 주도권 확보의 관건인 인접국과의 해양분쟁 가능성이 점증(漸增)하는 현실 역시 입지선정의 주요 고려 사유임은 물론이다.
군당국이 이같은 당위론을 처음 제기한 시점은 1993년이다. 그러나 정부의 의지부족 등으로 제주 해군기지 구상이 차일피일 미뤄져오다 2002년 5월에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마냥 미뤄둘 수 없는 화급한 안보현안이라는 외교안보연구원의 현실적 진단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군당국은 2008∼2014년 8000억원을 투입, 구축함과 잠수함 등 함정 20여척이 정박할 부두시설을 포함한 12만평 규모의 기본계획을 2005년 3월 수립했다. 그러나 찬반논란이 들끓자 대민갈등 최소화를 위해 제주도의 ‘동의’를 기다려준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제주 해군기지는 완공 예정시한이 차질없이 지켜진다고 해도 소요제기에서부터 따지면 20년 이상 걸리는 셈이다. 그런 마당에 해양안보를 위한 군당국의 구상과 김 지사의 결단이 명분도 별로 선명하지 않은 반발에 발목을 잡히고 있어 유감이다. 우선 도의회는 김 지사의 의사결정 과정을 문제삼아 대립각을 세우고 나섰다. 도의회는 “의회와 충분한 협의 없이 해군기지 수용을 발표해 민의를 유린했다”며 향후 의회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 김 지사의 ‘독선’을 견제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여기에다 ‘제주도 군사기지반대 도민대책위’는 2002년 이후 지속해온 반대투쟁의 끈을 김 지사 결정을 계기로 한층 더 죄고 있다. 군당국이 불확실한 미래의 안보위협을 내세워 제주도를 미국 해양패권 유지의 전초기지로 전락시키려 한다는 것 등이 시민단체들의 투쟁명분이다. 제각기 기지 후보지로 꼽히는 남원읍 위미1·2리, 안덕면 화순리, 대천동 강정마을 등 서귀포 지역 3개 읍·면·동의 반대파 주민들 역시 ‘삶의 터전’을 쉽사리 내주지 않을 태세다.
이런저런 제주의 모습은 한동안 적지않은 소요를 겪었던 경기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예정지의 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가 미군기지 부지를 ‘반미(反美) 정치투쟁장’으로 변질시키고 현지 주민들을 부추겨 사업진행을 가로막은 ‘허송세월’이 무려 3년6개월.
2003년 10월 정부 주한미군대책기획단이 발족한 이래 정부의 강제철거 방침에 막판까지 저항해온 주민 59가구가 올 3월 자진이주 하기까지의 기나긴 세월이다. 이 기간의 시위대 근로손실, 질서유지와 교통체증 등에 따른 사회적 비용만 537억원(단국대 분쟁해결연구센터 집계)에 달했다. 사업지연으로 인해 느슨해진 한·미동맹의 결속력 등 무형의 손실은 어림하기조차 어렵다.
이같은 피해를 낳은 사태의 끝은 결국 국익 우선의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융통성 발휘의 묘를 채택한 정부, 시민단체의 정치적 선동을 배제한 채 냉철한 이성을 되찾은 주민들간의 대화와 양보 그리고 타협이었다. 해군기지 건설 시행주체인 군당국, 기지의 수용주체인 제주도민들이 되새겨봐야 할 교훈이다.
가뜩이나 먼 길인데, 험로(險路)를 택해 더 멀리 돌아가는 우(愚)를 또 범한다면 피해는 제주도민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