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송희영 논설실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만나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해 농민과 국산 영화를 걱정하고, 미국의 개방 압력에 굴복하는 현 정권을 비난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대학생이거나 고교생이라면 다른 피해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시장 개방의 해일(海溢), 글로벌 경제의 회오리가 휩쓸고 갈 대상은 바로 한국의 10대와 20대의 일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피 끓는 젊은이라면 농민이나 영화 감독의 밥줄보다는 자기 밥그릇을 더 걱정해야 마땅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경제권에 편입하면 할수록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한국 기업이나 외국 기업은 점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을 되돌아 보자. 국내 기업이나 한국에 둥지를 틀었던 외국 회사나 도저히 사업할 수 없는 이 땅을 경쟁적으로 떠났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이 해외에 만든 일자리 숫자가 최소한 40만개를 넘어 최고 100만개라고 추산하는 사람까지 있다. 그만큼 한국의 젊은이들은 번듯한 직장을 잡을 기회를 잃었다.

    해외로 일자리가 유출된 것만 보면 안 된다. 외환위기 이래 국내에서도 기업들이 고졸이든 대졸이든 신규 채용을 억제했다. 게다가 모든 회사 내부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핵심 간부로 키워야 할 인재급은 정규직으로 대졸자를 채용하지만 나머지 보조 역할을 맡는 사원은 비정규직이나 파견 사원, 시간제 근로자로 채우고 있다.

    그 결과 회사 덩치가 커지고 이익이 더 늘어나도 사원 숫자가 늘지 않는 현상이 포스코나 대우해양조선 같은 우량 회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삼성그룹 내에서 삼성전자 다음으로 순이익을 많이 내는 삼성토탈이라는 석유화학 회사의 경우 극적 반전이 이뤄졌다. 지난 10년 간 매출은 1조원에서 3조원으로 초고속 성장을 한 반면, 사원 숫자는 2000명에서 98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나려고 몸부림치면서 매년 수백명을 한꺼번에 뽑아 모두가 함께 승진하고 정년 퇴임을 맞던 시대는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 사이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단어가 청년 일자리 실태를 설명하는 시사 용어로 자리잡았다.

    경제 전문가들은 ‘고용 없는 성장’( Jobless growth )이라는 용어조차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그 대신 ‘일자리를 잃는 성장’( Jobloss growth )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작년 한 해 40만개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봤지만 실제로는 30만개에 불과했다.

    경제성장률 5%가 한국 경제 수준에서 낮은 것도 아니건만 젊은 실업자를 대량 생산하는 경제구조로 변해버린 셈이다. 작년엔 10대 후반과 20대의 일자리 창출은 18.5% 줄었고, 50대의 일자리만 35.6% 늘었다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추정했다.

    지난 10년 사이 한국의 20대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악성 부실채권 같은 집단으로 전락했다. 장래 중산층 가정을 꾸려갈 만큼 직업이 안정된 20대는 많아야 20~30%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짐작한다. 그런데도 이것이 사회문제화 하지 않고 정치문제화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부모의 주머니를 털어먹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들딸들은 20세가 넘어도 선진국의 젊은이들처럼 독립하지 않은 채 학비와 용돈을 모두 지원받을 뿐더러 가족에 대한 아무런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

    캥거루나 기생(寄生)식물처럼 살아가면서 부모가 아파트 한 채 물려주기를 학수고대하는 20대도 적지 않다. 대학을 평균 6년 다니고, 그것도 안 되면 대학원을 갔다가 다시 유학까지 떠나는 청년이 부기지수다. 외국에 못나가는 계층은 취업 학원에서 빙빙 돌거나 PC방 주변을 서성거린다.

    프랑스의 20대는 자기들의 일자리가 위협받자 1년여 전 많은 도시에 분노의 불길을 당겼었다. 그러나 한국의 20대는 농민과 영화배우를 위해 분노하고 반미(反美)에 화염병을 던질 뿐 자신들의 밥줄에는 간절한 촛불을 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집권을 노린다는 정치 지도자들마저 이 사회의 ‘초대형 부실채권’에 무관심한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