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규민 대기자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3년에 ‘지율’이라는 승려가 ‘천성산의 도롱뇽이 죽는다’며 경부 고속철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내고 단식을 벌였지만 공사가 한창인 오늘날도 도롱뇽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죽은 것은 그가 걱정했던 도롱뇽이 아니라 공사 지연으로 인한 수천억 원의 국민 세금과 몇 년간의 귀중한 시간이었다.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는 장장 118일간의 기록적인 그의 단식은 소송을 맡았던 변호사에게 약간의 소득을 안겨 주고 몇몇 시민단체에 일거리를 제공했으며 기자들에게 한동안 기삿거리를 제공한 것 외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못한 사건이었다.
     
    예수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했고 석가모니도 진리를 얻기 위해 오랜 기간 단식을 했으며 인도의 간디도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단식을 벌였다. 이런 예들 때문에 그동안 단식이란 단어는 어쩐지 숙연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나라에서는 어중이떠중이들이 걸핏하면 단식 판을 벌임으로써 이 단어가 상당히 명예훼손을 당하기 시작했다. 지율의 단식 여파가 아직도 사회에 짐이 되고 있는 이때에 단식이란 단어가 지난주 또다시 모욕을 당했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천정배 의원에 의해 단식이 나쁘게 이용됐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권력’이 약자라니…

    그들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반대 단식은 소기의 뜻도 이루지 못했고 여론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만일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훗날 일기장을 읽을 때마다 스스로 지워 버리고 싶어할 부끄러운 기록들을 추가한 것이다. 천정배 의원은 한 언론 기고문에서 한미 FTA 협상이 얻는 것은 없고 내주기만 하는 ‘일방적 퍼주기’라고 했는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당신들이 집권 후 이제까지 북한에 하던 짓이야말로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미국에서 ‘퍼오기’를 잘해서 가난하던 경제가 일어났던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이 퍼오기 위해서 FTA를 맺는 것이다.

    단식은 행위자가 단식 이외의 저항 수단을 갖지 못한 약자이고 그 목적이 공익적일 때 여론의 지지를 받고 성과도 얻을 수 있다. 김 전 의장과 천 의원은 과연 정치적 약자인가. 그래서 단식 외에 달리 저항 수단이 없던 사람들인가. 한미 FTA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그들은 결코 약자가 아니다. 엊그제까지도 집권여당의 대표였거나 이 정권에서 국무위원을 지낸 ‘살아 있는 권력’의 핵심 세력들이자 아직도 실질적인 여당의 중진 국회의원들이다. 현직 국회의원인 그들은 국회 비준 과정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항의 수단으로 단식을 선택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단식 목적이 국익에 부합한 것인지도 따져 보자. 김 전 의장은 바로 6개월 전 “나는 국익을 위해 FTA 협상에 찬성한다. 그것을 친미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고 말했었고 천 의원도 국무위원 당시 FTA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확언했던 사람이다.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시한을 정해 놓고 졸속으로 협상을 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는데 시한은 이미 그들이 그런 발언을 할 당시에도 정해져 있었다. 정치인과 이 나라 경제 외교를 짊어진 관리들 중 어느 쪽이 더 국익을 챙길 전문가들이고 누가 더 국가에 이로운 존재들일까.

    국회의사당 안팎 사람 다니는 길에 천막 치고 단식하는 것은 “금식할 때 너희는 위선자처럼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두 정치인은 혹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에게 어떤 순수하지 않은 ‘기색’을 보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길거리 단식’에 국민은 식상했다

    “버릇없는 어린애가 부모에게 ‘내 말 안 들어주면 나 밥 안 먹을 거야’ 하고 떼쓰는 것 같다”는 어느 시민의 지적은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시각이다. 두 사람이 앞으로 또다시 단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런 국민여론도 고려해 소란스럽지 않게, 남의 눈에 안 띄는 곳에서, 꼭 몸이 상할 때까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바란다. 그것이 국익을 위하는 길이자 ‘길거리 단식’에 식상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더 이상 단식을 모독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