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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성호 객원논설위원이 쓴 시론 '수구파(守舊派), 그때와 지금'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13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체결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을 때 많은 국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70 대 30 또는 60 대 40의 비율로 지지를 받는 한·미 FTA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심드렁한 문제라니, 그렇다면 이것을 찬성한 대다수 국민은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격’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노 대통령의 이어지는 말 -“철저하게 실익 위주로 협상하되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면 체결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에서, 아 이것은 우리 협상 대표단에 힘을 실어주는 말이로구나, 미국을 압박하는 외교적 수사로구나 하며 안도하게 됐다. 그러면 그렇지 한·미 FTA가 우리의 살 길이라던 대통령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있겠는가.
그러니 미국 친구들이여, 이제 윈윈 대타협의 순간에 이른 한·미 FTA 협상의 막바지 고비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다가 쪽박을 깨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라. 장사꾼의 심정으로 무장한 한국 대통령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을 말아라. 우리 대통령은 깽판이라는 단어와도 친숙한 분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대단원을 준비하라.
그런데 이 순간에도 한국에선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 옮겨다니며 극렬한 반대 데모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FTA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협상·체결하라는 것이 아니고, 아예 이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 농민을 죽이는 행위라고 부르짖는다. 이들은 한·미 FTA가 우리에겐 ‘제2의 개국’이라는 내외의 평가에 귀를 막는다. 이들의 완고한 모습에서 우리는 과거 수구파(守舊派)의 환생을 보고 있다.
1969년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자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막대한 건설비를 조달하려면 인플레가 일어나 나라 경제를 망친다.’ ‘통행량도 적을 텐데 건설 이후 적자를 어떻게 감당하려느냐.’ 등이 주요 반대 이유였다. 반대의 선봉은 5·16 쿠데타로 정권에서 물러나 야당이 된 민주당 세력이 맡았다.
당시의 야당은 윤보선, 박순천, 유진오씨 등이 이끌었다. 특히 한국 여성 정치가 제1호 박순천 여사는 1960년대말 서울에 고층건물이 임립(林立)하자 ‘빌딩 먹고 사느냐’고 냉소하기도 했다. 타임 머신을 과거로 돌려 그때의 잣대로 분석해보면 이들은 수구파다. 반면 개혁과 개방을 국시로 정하고 경제 제1을 행동강령으로 삼은 박정희 등 군부 출신세력은 진보파였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속고도를 건설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가끔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 후 박정희 신도(信徒)들은 나라의 면모를 확 바꾸는 진보파의 맥락을 이어갔고 오늘날 산업화 세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편 김영삼, 김대중 등 당시의 젊은 정치인들은 수구파의 맥락을 이어갔고 오늘날 민주화 세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 거리에서, 강단(講壇)에서 한·미 FTA를 반대하는 집단을 진보 집단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어불성설이다. 지구촌 시장경제로의 편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보적이라고 부른다니 소도 웃을 일이다. 2007년 3월1일 현재 194개 FTA가 지구촌을 그물처럼 엮어가는데 거기서 외톨이가 되자고 외치는 이들은 보수 가운데서도 극보수인 수구파다. 민족자본은 쥐뿔도 없으면서 외자 도입을 매판(買辦)자본의 앞잡이라고 반대하던 과거 근시안들의 환생이다.
역사의 사리를 따지면 분명 이런데도 지금 FTA를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수 딱지가 붙고, 고속도로가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던 정서와 일맥상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보 딱지가 붙었다. 딴 건 몰라도 FTA 찬반 시비 하나만 놓고 보면 우리는 지금 헷갈림과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수구파의 생각은 언제나 틀렸다는 것이 한국 역사의 경험칙이다. 그런 점에서 임기를 1년도 채 못 남긴 노무현 대통령의 ‘백조의 노래’가 곧 울려퍼지길 기대한다. 아울러 4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환생한 수구파는 이쯤에서 시대착오의 머리띠를 벗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