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권영빈 논설고문이 쓴 '진보는 없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기획 취재했던 연재물을 보완해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을 발간했다. 이 책은 진보세력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해, 고달픈 서민의 삶이 참여정부 기간 중 더 악화됐음을 구체적 사례로 보여 주고 있다. 진보 개혁 위기의 외인(外因)은 신자유주의 세력의 부상이고 내인(內因)은 이에 대처하지 못한 진보 개혁세력의 무능, 문제해결 능력과 대안 제시 부족 등이라 꼽고 있다. 또 참여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진보에 대한 배신이라 규정한다. 진보 개혁세력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나"라는 문제에 답하지 못하는 한 한국의 미래, 진보의 살길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좌파 진영의 자성과 대안 모색은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병행해 백가쟁명(百家爭鳴)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일부 의원이 인기 없는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 위해 탈당했듯, 진보진영도 노무현식 진보와의 차별화를 선언하듯 커밍아웃을 쏟아내고 있다.

    진보 개혁세력의 위기와 무능의 실체는 무엇인가. 진보진영 스스로 모르거나 외면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나는 본다. 첫째, 역사적 효용성에서 멀어졌다는 점이다. 민주화 20년의 주축이었던 386세력들의 공감대는 크게 보면 '민주' '민족' '민중'이라는 개념 틀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들이 통칭 진보 개혁세력으로 민주화를 주도했고 정권도 장악했다. 김영삼 정부의 집권은 '민주'의 달성이라고 본다. 역사 바로세우기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줄줄이 감옥행을 하면서 독재 항쟁의 깃발이었던 민주 문제는 일정 부분 해소됐다. 김대중 정권은 남북 정상회담으로서 '민족' 문제를 현실화하는 데 기여했다. 노무현 정권은 '민중' 문제 해결사로 등장해 기득권층을 적으로 몰아 경제평등주의를 구현하려는 듯했지만 본인의 표현대로 '유연한 진보'였던 탓인지 크게 성공하지도, 정책의 일관성도 유지하지 못한 채 진보의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겪고 있다. 성공 부분도 있고 실패 측면도 있지만 진보세력은 나름대로 역사적 소임을 마쳤다. 역사적 효용성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낡은 틀로 역사의 진보임을 자처하니 괴리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의 지적대로, 진보가 보수 이념을 독점하고 보수가 오히려 진보 이념을 채택하는 기형적 정치 이념이 진보의 위기를 부르고 있다. 민족동맹은 보수 우익의 전유물이었는데 통일지상주의 진보진영이 이를 채택해 북을 돕자면 진보고 투명하게 하자면 보수가 되는 기현상이 일고 있다. 기존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 변화를 유도해 좀 더 나은 사회를 이루자는 이상이 있을 때 그것이 진보고 개혁이다. 평준화 교육이 실시된 지 30여 년이다. 세계의 교육경쟁력과 한참 떨어졌다면 이를 개혁하자는 쪽이 진보다. 자립형 사립고도 더 만들어야 하고 외국으로 떠나는 학생을 잡기 위한 경쟁력 교육을 강화하는 게 진보의 길이다. 그런데 철 지난 평준화 교육을 붙들고 있으면 진보고 이를 고쳐 보자면 수구 보수라고 하니 엄청나게 전도(轉倒)된 가치관 아닌가. 세계는 이미 무한경쟁체제의 경제 블록화 시대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 처지로선 한·미 FTA란 불가피한 건널목이다. 어떻게 협상을 풀어 갈지 보수·진보가 함께 고뇌해야 할 과제인데 지지하면 민족의 배신자니 이게 무슨 진보 개혁인가. 진보·보수의 이념 혼선을 정리하지 않고선 진보·보수 모두 정체성 위기와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진보 개혁세력이 무능과 대안부재를 자탄하고 있지만 민주 민족 민중 논리로는 더 이상 이 복잡계 세계의 문제를 풀 수 없다. 한탄만 할 게 아니라 노선을 바꿔야 한다. 진보가 밥 먹여 주나라는 의문을 이념과 사상으로 풀려 하니 무능과 대안부재에 빠진다.

    다시 한번 '문제와 주의' 논쟁을 거론하겠다. 1920년대 중국 지식인 사회에 치열한 이념논쟁이 있었다. 사회주의자 천두슈(陳獨秀)와 민주주의자 후스(胡適)가 대표주자였다. 후는 이렇게 한탄했다. 교통의 선진화를 위해 자동차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연구하지 않고 왜 사회주의자들은 인력거꾼의 노임 문제만 물고 늘어지는가. "더 많은 문제를 연구하고 더 적게 주의를 논하자(多硏究些問題 少談些主義)." 이런 과제들을 극복하지 않고선 우리 사회에 진정한 진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