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인선 정치부 차장대우가 쓴 '회칼 든 폭력배가 전철을 탔다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0여년 전 일본 한 지방 신문사의 초청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서 원폭피해에 대해 취재한 일이 있다. 두 도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된 핵무기인 원자폭탄이 준 피해와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곳이다. 한 달 동안 두 도시의 피폭현장을 돌아봤다. 피폭자들에게 1945년 8월 6일 원폭이 투하됐던 날의 ‘악몽’에 대해 듣고 또 들었다. 그들은 말했다. “살아서 지옥을 보았습니다”라고.

    두 도시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20만명 이상의 목숨을 빼앗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끌어내 2차대전을 마무리지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 ‘평화공원’이 있고 그 옆에 ‘평화기념관’이 있다. 두 도시에서 ‘평화’란 그곳에서 평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반증이었다.

    당시 들은 증언 중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학교 교실에서 몰살된 아이들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불탄 상태였다. 어머니들은 숯덩이가 된 시체 옆에서 도시락을 찾아냈다. 철제 도시락 안의 반찬도 재로 변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시신에 비하면 상태가 나았다. 어머니들은 그날 아침에 도시락에 넣어준 반찬을 통해 자기 아이를 구별했다고 한다.

    그렇게 매일 피폭자들을 만나고 다니던 어느 날 밤, 원폭이 투하됐던 ‘폭심(爆心)’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텔에서 악몽을 꾸다가 깼다. 창 밖으로 어둠 속에 싸인 평화공원 쪽을 보고 있으려니, 철골만 앙상한 건물이 남아있는 폭심 부근에서 음산한 비명이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있던 온갖 전쟁과 평화의 이론들이 발 밑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핵 억지 이론’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끔찍한 이야기인데도 추상화시키고 나니, 가공할 위력에 대한 ‘실감’이 사라져 아무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핵실험 후 사재기 현상이 없었던 이유 중 ‘비슷한 일이 반복돼 둔감해져서’란 의견이 34.6%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상황은 악화되는데, 그에 걸맞은 위기감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북핵에 대해서 정부가 늘 ‘협상용’이니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니 하면서 본질을 가린 결과, 위협에 대한 정상적인 판단감각도 마비된 것이다. 어쩌면 정부도 ‘희망’ 섞인 정책을 추구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치학자는 “얼굴에 칼자국 흉터가 있는 남자가 날이 시퍼렇게 선 회칼을 들고 지하철에 탔다고 해보라. 그가 아무리 ‘나쁜 의도가 없다’고 한들 어떻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그만큼의 위기감도 못 느끼고 있다”고 했다. 북핵문제가 시작된 이래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을 계속했다.

    해서는 안 되는, 그러나 할까 봐 우려됐던 더 나쁜 일들을 차례로 해왔다.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안보를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안이 나와도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정부와 여당은 적극적으로 안보를 강화할 고민을 하기보다는 ‘개성공단·금강산 사업’, 나아가 ‘포용정책’ 살리기에 더 열을 올리는 것 같다. 이 정부는 북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 외에 안보를 지키는 다른 방법은 모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