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 '포럼'란에 문학평론가인 이태동 서강대 명에교수가 쓴 <한미동맹과 ‘노대통령 외교’의 허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외교라는 말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략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이는 “(외교에서) 조국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애국적 행위”라는 암브로즈 G 비어스의 말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직이 최고의 외교정책’이라는 비스마르크의 말처럼, 오늘날의 외교는 이성적인 인간관계를 토대로 한 상호이익에서 출발한다.

    지난 달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미국에 ‘줄 것을 다 주면서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는 취지의 불만을 터뜨린 일이 있다. 인터뷰 내용으로만 본다면 국가원로인 전직 대통령의 훈수(訓手)로 넘길 만도 하지만, 최근 한미간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그의 말은 결과적으로 한미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사려 깊지 못한 말’이 돼 버렸다. 그렇다면 혈맹(血盟)이라 불리던 한미관계가 이처럼 불편한 관계가 돼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은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추구해온 ‘친미(親美)와 자주(自主)의 부적절한 만남’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나름대로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분석이지만, 노 대통령이 보인 이중적 대미외교라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원인을 빠뜨리고 있다.

    그동안 노 대통령은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며 곡예에 가까운 줄타기 외교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는 대미 관계를 국가 안위를 위한 외교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국내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도 “얼굴을 붉힐 일 있으면 붉히겠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등 대미 외교를 이중적으로 이끌어 왔다.

    가령, 미국 의회와 정부 지도자들 앞에서는 대단히 친미적인 발언을 하면서도 귀국 후에는 항상 ‘자립’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반미’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모습은 미국으로 하여금 노 대통령과 그의 이중적 ‘친미’ 제스처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지는 않았을까. 혹자의 말처럼 노 대통령만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예, 예 한 한국 대통령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이중적 태도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으로부터 자신의 ‘발언이 존중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노 대통령 특유의 ‘자주외교’와 표리부동한 자세는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을 접견할 당시 북한과 관련한 방코델타아시아(BDA) 조사의 ‘조기종결 요청’ 여부에 대해서 이태식 주미대사와 ‘엇박자’를 보인 것은 미국 측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까지도 노 대통령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할 만했다. 이뿐이 아니다.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레바논에 한국군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발언을 청와대가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국내 정치가 중요하다 해도 국가간의 신뢰를 잃을 만큼 심각하다.

    외교는 점잖은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좀 못마땅하고 미진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을 참고 예의를 다하며 진실된 면을 보일 때 비로소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 아무리 외교 무대라고 하지만, 모든 것을 정략적으로만 접근하게 되면 상호간에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미국 정부와 국민은 비록 언어의 장벽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랜 민주주의와 국제외교의 경험으로 진실과 거짓을 파악하는 데 밝다. 신뢰감을 상실한 채 속이 들여다보이는 낮은 수준의 전략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서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건국 이래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한미관계의 신뢰 회복은 일관되고 정직한 외교 정책을 펼 때만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