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홍정기 논설실장이 쓴 시론 <연패기(連敗記)-김병준과 전효숙>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여름 김병준, 가을 전효숙 - 인사청문회의 역사는 2006년의 여름과 가을을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인사청문회가 짧은 역사 1년간 펼쳐온 다섯 장면은 누구의 상상력도 못미칠 정도다.

    장면1: 2005년 1월9일 = 이기준 제5대 교육부총리가 오는 듯 갈 즈음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월4일 그를 기용했지만 57시간 남짓 만인 7일 사표를 받아야 했다. 1998~2002년 서울대 총장 시절의 판공비 편법 조달 등과 같은 ‘총장 부적격 사유’가 도진 것이다. 노 대통령은 1월9일 국무위원 인사청문회 도입을 지시했다 -“공직 검증 시스템을 선진화하는 계기로 삼으라. 국무위원의 경우, 관련 국회 상임위에서 하루정도 청문을 받는 방안을 검토하라.”

    장면2: 2005년 7월28일 = 개정 국회법 제65조의 2 등으로 인사청문 대상을 넓힌 날이다. 국회는 개정 이유에서 장면1의 ‘노 대통령 지시’를 빼고 ‘일하는 국회’가 다 알아서 한 것이라고 했다 - “일하는 국회를 실현하고 입법부의 역할·기능을 제고하기 위해 인사청문 대상을 모든 국무위원, 헌법재판관 및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확대한다.”

    장면3: 2006년 7월18일 = 김병준 제7대 교육부총리 후보 인사청문회날이다. 장면 2가 없었더라면 안해도 될 청문회였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안열어도 될 말문까지 열었다.

    “후보자가 개인적으로 흠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죽 지적사항이 없으면 계속 자녀문제 공방이 오가겠느냐.”(안민석)

    “한나라당은 ‘코드 인사’라지만 대학교수로서, 행정가로서, 청와대 정책실장으로서 교육경험도 풍부하고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정봉주)

    그나마 그당 한 관계자가 열린우리당의 열망 아닌 우수를 털어놨다 - “여당이 공개된 청문회에서 ‘노무현 사람’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노 대통령은 사흘 뒤인 7월21일 김 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했지만 그 또한 안하느니만 못했다. 청문회를 대신해 논문 표절·중복 논란이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은 또 그 사흘 뒤부터였다.

    장면4: 2006년 7월30일 = 김 부총리가 역시 ‘노무현 사람’답게 청문회를 한번 더 하자고 했다.

    장면5: 2006년 8월1~2일 = 청문회 아닌 청문회가 또 열렸다. 장면3의 안민석은 축배를 독배로 바꿔들었다 - “교육개혁을 주도할 수장은 지고의 도덕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기대가 팽배한데 이미지가 훼손되고 도덕성에 타격을 입어 교육개혁을 잘 할 수 있겠느냐.” 김 부총리도 맞받았다 - “사퇴는 무슨 사퇴냐.”

    그가 사의를 밝힌 것은 바로 그 이튿날, 그도 노 대통령도 길고긴 한여름 밤을 그리 길게 보냈다.

    도로 장면3: 2006년 9월 6~7~8일=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가 전효숙을 불러 묻고 따졌다. 하지만 청문회를 닮았을 뿐 청문회가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사이비 청문회였다. 8월16일 노 대통령이 ‘3 + 6년 임기’의 헌재소장으로 지명해 헌법 제111조 4항과 제112조 1항을 한꺼번에 어겼다. 노 대통령과 이용훈 대법원장이 그 위헌을 간과했더라면 전효숙 헌법재판관이 나서 그것은 헌법이 아니라고 바로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그날 전해철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지명통보 전화를 받고 재판관직 사표내라고 하니 그러마고 마음먹었다던가.

    노 대통령은 8월22일 국회에 전효숙 헌재소장 임명동의를 요청하고 그 사흘 뒤 재판관직 사표를 수리했으니 헌법 제84조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와 국무총리 및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副署)요건까지 다 우습지도 않게 만들었다.

    도로 장면4: 2006년 9월21일 = 노 대통령은 9월7일 ‘헌재소장 임명동의 요청 + 재판관 인사청문 요청’으로 한번 바꾸고 21일에는 ‘재판관 인사청문 요청’으로 도로 돌렸다. 도로…그렇다, 도로(徒勞)다.

    그래도 노 대통령은 28일 밤 MBC 토론에서 “헌법과 국민이 준 기회이기 때문에 중도진보 성향의 헌재소장 임기를 최대한 확보해주고 싶었을 뿐”이라며 또 ‘시대정신, 시대과제’를 들먹였다.

    도로 장면5를 기다리며 법전을 덮고 묻는다. 법률가 대통령시대의 ‘노무현 헌법’은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줄을 그었을 수험서만큼이나 낡고 헌 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