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성호 객원논설위원이 쓴 시론 '우리가 사는 어두운 세월'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주 애매모호한 말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어떤 때는 그 진의가 무엇인지 의심 가게 한다. 엊그제의 ‘주한미군 인계철선 불원(不願)’발언도 그렇다. 노 대통령은 방미 기간중인 지난 13일 미국 의회 지도자와의 간담회에서 “우방의 군대를 인계철선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주한미군은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든, 한강 이남 평택에 있든 한국에 주둔하는 한 인계철선(tripwire)이 될 수밖에 없다. 북한군이 남쪽을 건드리는 순간 터지게 돼 있는 것이 주한미군의 운명이다. 서울 남쪽에 있으면 휴전선 턱밑에 있는 것보다 초기 희생이야 덜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데도 터지지 않는 주한미군이라면 그 존재 의의가 없다.

    물론 노 대통령은 우방 젊은이들의 목숨을 인질로 삼는 게 미안해서 이렇게 말한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전쟁 발발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면 미안한 일도 무릅써야 한다. 인계철선 불원은 그 뜻은 좋다만 미군 철수를 원하는 것 같은 오해를 내외에 불러일으킬 수 있다. 1950년 6월25일의 전면 남침을 기억하고 지금은 북한 핵과 미사일을 알고 있는 국민은 주한미군이 인계철선이 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전시 작전통제권 조기 단독행사를 고집하는 노 대통령의 의중도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작권 공동행사는 ‘벽상(壁上)의 보검’이다. 이 벽상의 보검은 말 그대로 전시에만 내려지게 돼 있다. 일단 이 보검이 내려지면 전쟁 도발자는 철저히 응징된다. 목숨도 추스르지 못할 그 응징이 무서워 아무도 한국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전쟁터는 이미 쑥밭이 된 뒤일 터이니 이 칼은 결코 벽에서 내려지면 안된다.

    그런 반면 한국군의 전작권 단독행사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 한국군 혼자의 힘으로는 전시 침략자의 목을 칠 수 없다. 단독행사 시에도 미군이 도울 텐데 무슨 걱정이냐고 말하면 세가지 사실을 짐짓 모른 체한 말이 된다. 현대전은 속도전이라는 점, 서울과 휴전선이 너무 가깝다는 점, 필승을 보장할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정보를 국군은 모른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전작권 단독행사’라는 종이 호랑이는 업신여김의 대상이 될 뿐이며 벽상의 보검을 아예 녹여 없애자는 주장은 멸시를 자초하는 초청장이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인지 불명료한 발언 가운데는 “경제는 좋지만 민생은 어렵다”는 말도 포함된다. 이 발언이 있은 후, 민생이 어려우면 곧 경제도 나쁜 것이지 어디 그런 모순된 말이 있느냐고 물의가 빚어졌다. 결국 “거시지표는 좋지만 체감경기는 나쁘다”는 타협적 해석으로 마무리됐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의 거시지표는 좋은가.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한 나라의 경제를 통틀어서 좋다 나쁘다 말하는 판단 기준으로는 성장률·물가·국제수지의 세 가지 지표를 꼽는다. 한국 경제성장률은 노정권 3년 동안 평균 3.9%였다. 이것은 잠재성장률 4.6%에도 못미치는 것이고 세계 평균 성장률보다도 크게는 1% 포인트 정도 낮은 것이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순위도 인도(10위) 브라질(11위)에 이어 12위로 주저앉았다. 올해도 4%대에 머무를 것이라니 ‘조로(早老)하는 한국 경제’라는 말이 들린다. 큰 문제는 국제수지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 전망치를 당초 160억달러 예상에서 100억달러로 줄이더니 다시 40억달러로 내리고 있다. 내년에는 적자 전환도 암시한다.

    물가는 작년과 금년 대체로 3% 안팎 상승에서 움직이고 있어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지만 물가에서 비중이 가장 큰 집값은 참기 어려운 수준에 와 있다. 부동산 시세와 공시가격 폭등에 덧붙여 아파트 평당 분양가 2000만원 시대의 임박은 서민들의 기를 죽이고 있다. 거기다 최근의 전세금 폭등과 품귀는 어떻고? 결국 민생은 나쁘지만 경제는 좋다는 대비가 성립되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세상은 어둡고 미래는 불안한데 민생마저 팍팍하다. 지금 우리는 세계 부자나라 클럽에서 한국이 2년 연속 자살률 1위라는 통계가 눈길을 잡는 세월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