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쓴 '후반전이 한창인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94년 어느 날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난데없이 흑인 한 명을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1년 전 힐러리 여사가 주도한 의료개혁이 참패한 뒤 분위기 반전을 위한 정치적 기획이었는데 뜻밖에 효력을 발휘했다. 그 흑인은 '빈곤과의 전쟁' 일환으로 존슨 정부가 시작한 공공보육(Head Start)을 통해 건장하게 성장한 중년 신사였고, 급기야 유명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인재였다. 누가 봐도 박사처럼 생긴 그는 Head Start가 없었다면 자신은 빈민가에서 마약이나 팔았을 거라고 민주당의 빈곤정책을 한껏 치켜세웠다.

    얼마 뒤 클린턴은 촌스러운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장에 섰다. 거기에는 '0'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미국의 고질병인 정부 적자재정이 이제야 비로소 분기점에 왔다는 제스처였다. 미국민은 환호했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80년대 몰락하는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세 차례의 조세개혁을 단행했던 레이건의 몫이란 것을. 흥미로운 사실은 두 개의 정치기획이 상충적인 목적을 가졌다는 점이다. 전자는 복지정책의 유용성을 선전한 것이고, 후자는 복지삭감을 위한 전야제 격 행사였다. 이 '상충'은 클린턴의 연출능력 속에서 '상생'으로 바뀌었다.

    2006년 8월 31일 한국의 기획예산처 장관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장장 140쪽에 달하는 국가경영 지도이자 '복지한국'의 설계도였다. 기자회견장은 그런대로 붐볐지만 언론의 관심은 현 정부가 모처럼 마련한 '한국의 희망지도'에서 '희망'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재정이 얼마가 더 들 것인가, 세 부담이 얼마나 더 늘어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조간신문에는 '11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가 대서특필됐다. '1600조 필요한 소설 같은 비전' 또는 '세금 먹는 하마, 비전 2030' 등으로 규정됐다. 세간의 사랑을 듬뿍 받는 정운찬 서울대 전 총장은 "그게 20대와 30대를 위한 프로젝트인 줄 알았다"고도 했다. 그때 대통령은 고향 마을을 들러 퇴임 후 정착할 거처를 물색하고 있었다. 후반전이 한창인데, 벌써 경기 종료를 떠올리게 하는 행보였다. 근사한 외양을 갖춘 '비전 2030'은 선포와 동시에 그렇게 종료되었다.

    '비전 2030'은 그렇게 사장될 사안은 아니다. 복지한국의 '자연적 진화'를 체계화했고, 거기에 돌 하나 얹어놓듯 참여정부적 염원을 가미한 것이다. 현 상태를 유지해도 그 정도의 재정은 필요하다. 복지의 동력인 경제성장이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것 외에는 미래 청사진으로 삼을 만하다. 그런데 누구도 그 진가를 알아주지 않았고, 누구도 집권세력의 진정성을 가슴에 담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싶은 것이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으랴?"-국민이 조심스럽게 묻고 싶은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5.31 선거 완패 이후 중앙정부의 통치력은 얇은 유리병처럼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때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로 유리병 깨지기를 자청하는 것은 정치 고수의 선택은 아무래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진보정치의 정체성인 '생활안정'과 '보장'에 집중할 듯도 한데 말이다. 25년 뒤 복지 수준을 현재 미국과 일본의 중간 정도로 가꾸자는 계획은 실현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사안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으랴. 대신 "더 시끄러운 말을 할 건데요…"라는 그리스발(發) 발언 같은 것에 국민은 얼마나 고단한 잠을 청하는지 알기나 하는지. 그리고 잠 덜 깬 아침 '대통령 고향집 마련하다'라는 뉴스가 들려오면 커피 아닌 때 이른 소주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제대로 다듬으면 '비전 2030'은 한국의 '희망지도'일 수 있다. 장관이 대독하고 통치자는 고향 갈 생각에 가슴 설레는 마당에 누가 희망을 만들고 누가 책임을 질까. 국민도 돌아앉고, 관료들도 돌아앉았는가? 후반전이 한창인데, 관전하는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