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가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9월 14일 한·미 정상회담이 전시 작전통제권의 한국 단독 행사와 한미연합사 해체의 원칙을 천명하고 뒤이은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가 그 조건과 일정에 합의하면 미군의 한국 주둔은 막을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두 나라는 미군의 일부가 잔류하고 비상시에 추가 지원할 것을 ‘문서화’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때 가봐야 한다. 군사 대국인 미국은 자국 군대가 남의 땅에서 그 나라의 군사적 작전통제를 받는 상황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그 상황에서는 그럴 것이다.

    아마도 한반도에 핵이 폭발하고 전면전의 양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공군의 지원은 몰라도 지상군의 투입은 없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차기 대선주자들은 자신이 집권했을 때 ‘재협상’을 추진하겠다고 하지만 부시의 태도로 보아 재협상은커녕 노무현 정부가 가기 전에 서둘러 이 문제에 매듭을 지을 태세여서 내년 대선의 향방은 별 의미가 없다. 야당의 반대는 없었다. 어제 당대표가 여야 영수회담 운운하고 나섰는데 그동안 이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는 어디 갔었는지 버스가 떠난 뒤 뒤늦게 손을 들고 나선 꼴이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정권 담당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독단적 상상력에 이끌려 다니며 중심을 잃어 왔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6·15’를 만들어 내면서 첫째, 북한은 한국을 침공할 의사와 능력이 없다. 둘째, 미군은 통일 이후에도 한국에 주둔한다는 것을 마치 북한과 합의한 듯이 국민에게 선전했다. 그래서 국민은 북한의 군사력이 우리보다 열세인 듯, 미군의 보호막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지켜줄 듯한 환상에 빠져 스스로 무장 해제를 해왔다. DJ 자신이 세상을 잘못 읽었거나 아니면 국민을 기망한 꼴이다. 게다가 6·25 전쟁의 기억이 없는 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 사회는 쉽게 ‘자주·민족’에 기울어 안보 불감증에 빠져 가고 기회주의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안보 장사’에 신이 났다.

    이제 우리는 환상과 세뇌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스러질 수도 있다는 현실 앞에 홀로 서야 한다. 이런 마당에 미군의 계속 주둔이나 작전통제권 문제로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미국에 속만 더 보이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미국’이라는 방패가 걷힌 상황에서 앞으로 우리의 안전을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이며 우리의 경제를 어떻게 유지해 나갈 것인가에 온 국민의 정열이 모아져야 한다.

    제일 시급한 것은 북한의 ‘불바다’나 ‘전쟁 화염’에 대처하는 일이다. 북한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그들의 무력 도발이 주한미군을 사상자로 만들어 미국의 보복을 초래하는 것이었다(사실은 미국도 그것을 제일 경계했다). 이제 미군이 없어진 만큼 북한의 위험한 도박은 그 문이 열렸다. 특히 국지적 도발이나 무력적 시위로 한국에 폭발적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커졌다. 그래서 우리의 국방력을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기를 현대화하고 온 국민의 방위훈련 등을 이스라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북의 대량살상무기에 대비한 전략도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세금도 지금보다 더 많이 내야 한다. 자주 국방이 결코 쉽고 값싼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내년 대선에서 여야 정당과 후보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구체적 실천 계획을 공약해야 한다.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럴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북한에 유화적일 수밖에 없다. 이 땅에서 불장난만은 막아야 한다면 때려도 맞아주고 요구하면 들어주고 화나지 않도록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 노무현 등 좌파정권이 가고자 하는 길일 것이다.

    둘째, 차기 정권은 다자간 안보 또는 지역 안보를 위한 다면 외교에 주력해야 한다. 대일 외교도 지금처럼 자존심 일변도로 나가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 미국과 손잡은 일본이 아시아의 패자임을 밀고 나갈 때 한국의 ‘자주’는 큰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바다 건너 서쪽에 북한의 동맹국이며 세계의 강국 대열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도 있다. 대(對)중국 외교는 어쩌면 한국 안보의 지렛대가 될 것이다.

    셋째는 미군의 존재가 사라진 곳에 닥칠 수 있는 국내외적 경제활동의 썰물현상에 효율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외국의 투자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국내 생산력이 저하하지 않도록 하는 경제외교와 경제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한국을 살리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를 잘못 선택한 우리 모두의 자업자득이며 국가의 숙명이라는 것을 빨리 깨닫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