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정치부장이 쓴 '열네 살 소년병을 아십니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6월 어느 지방도시의 뒷골목. 아침 공기를 가르며 목탁 소리가 울린다. 70대 할아버지 한 분이 혼자서 목탁을 두드리고 온몸을 던져 절하는 예불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아침 예불을 올린 지가 30년째. 누구를 위한 예불일까.

    56년 전 1950년 6월 그는 국군이었다. 그냥 국군이 아니라 소년 국군이었다. 북한 인민군이 물밀듯 밀려올 때 어린 학생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물밀듯이 자원 입대했다. 이들 학도병 중에는 14세부터 16세까지의 이른바 ‘소년병’들도 수천명에 달했다. 당시 징집 연령은 18세였지만, 그것이 문제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기 키만 한 총을 잡은 열네 살 아이는 온몸을 가루로 만들 듯이 작렬하는 포탄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이 할아버지도 그때 그 자리의 소년병이었다. 부대가 후퇴할 때 힘이 약한 소년병들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친구와 함께 뒤처졌다. 갑자기 포탄이 떨어지고 파편이 친구의 몸을 꿰뚫었다. 적이 밀려오는데 친구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친구는 죽여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극단의 상황 속에서 소년병은 결국 친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 비극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목숨을 거두어 준 친구의 명복을 30년째 빌고 있다. 작은 돌에 새긴 이름을 말없이 닦는 그의 눈에 눈물이 비치는 듯했다. 그 누구도 짐작조차 못할 고통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얼마 전 한 TV가 방영한 6·25 소년병 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이제 70이 넘은 생존 소년병들을 보며, 우리가 지금 이만한 나라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누구의 고통 위에 서 있는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냥 앉아 있어도 어차피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럴 바에야 나가서 싸우다 죽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소년병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일주일간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명목뿐인 훈련이었다. 총이라도 한 방 쏴 본 소년병이 없었다. 운동장에선 매일 “어디 전선이 터졌다” “어디가 무너졌다”고 외치는 고함이 이어졌다. “우리는 급한 마음에 무너졌다는 전선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이쪽으로 우르르,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렇게 몰려간 전장(戰場)은 아이와 어른을 구별하지 않았다. 2000명이 넘는 소년병이 전사했다. 특히 많은 소년병이 전사한 곳이 낙동강 방어선, 그중에서도 혈전이 벌어졌던 다부동 전투였다.

    다부동 전선에 투입됐던 한 소년병의 어머니는 총탄과 포탄을 뚫고 최전선까지 어린 자식을 찾아왔다. “어머니하고 끌어안고 울었어요. 지금도 그때 어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이제는 늙어 버린 소년병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 다부동의 전적비에는 ‘내 짧은 인생을 영원히 조국에’라고 적혀 있다.

    전사한 소년병들의 인생은 짧다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열넷, 열다섯 인생은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사라졌다. 자식을 가슴에 묻었던 부모는 이제 대부분 사망했고, 형제자매마저 세상을 뜨면 그들의 흔적은 세상에서 지워진다. 그들이 남긴 것은 전적비에 새겨진 이름 석 자와 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지키려 했던 이 국토와 태극기뿐이다.

    늙은 소년병은 “우리는 순수했다”고 말했다. 그 순수한 피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우리는 56년 전 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이 택한 길과 그로 인해 겪은 지옥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 아이들의 기억과 부모형제의 고통은 이렇게 흔적 없이 잊혀져 가도 좋은가. 소년병의 존재가 제대로 확인된 것도 얼마 전이라고 한다.

    6·25 소년병들의 사무실은 어느 지방도시 작은 빌딩의 초라한 옥상 가건물에 있었다. 6월을 보내며, 그 좁은 공간을 떠돌 어린 영혼들을 생각한다. ‘애국’이란 말이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그들. 누군가가 그들을 기억하고, 살아남은 우리가 잘사는 것, 우리가 그들에게 진 최소한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