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 '노트북을 열며'란에 이 신문 송상훈 사회정책팀 차장이 쓴 '교육부총리의 도박'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3년 9월. 재정경제부는 강남 집값과 씨름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건설 중인 판교 신도시는 그때 제시된 대안 가운데 하나다. 재경부는 판교 신도시 계획에 자립형 사립고나 특목고 설립을 넣으려 했다. 강남 집값이 오른 것이 교육환경 때문이고, 판교가 성공하려면 강남에 견줄 만한 '학원 단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재경부 장관이 김진표 현 교육부총리다. 김 부총리는 재경부 장관 때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자사고나 특목고를 많이 세워야 한다" "강북에도 세워야 격차가 해소된다"고 자주 얘기했다. 한번은 기자에게 "판교에 자사고를 세우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판교 단지에는 특목고 또는 자사고가 들어설 부지만 정해둔 상태다.

    2006년 6월. 김 부총리가 폭탄선언을 했다. 사는 지역에 따라 외국어고등학교 지원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이다. 전국 어디서든 외고에 지원할 수 있는 현 제도가 고액 과외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또 외고가 설립 취지와 달리 입시기관으로 전락했다고 비난했다. 지금처럼 외고에서 세칭 일류대학의 어문계열이 아닌 과에 많이 들어가면 외고를 없애겠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김 부총리는 대신 '공영형 혁신학교'를 내세웠다. 공영형 혁신학교 구상의 시작은 판교 신도시에 자사고와 특목고를 세우려던 것과 비슷하다. 김 부총리가 2005년 7월 "혁신도시에 교육 여건을 만들기 위해 '공영형 자율학교'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며 혁신학교 얘기를 처음 꺼냈다. 이후 자율학교는 혁신학교로 바뀌었고, 이제 자사고나 특목고의 대안으로 진화했다. 3년 전과 지금, 자사고나 특목고에 대한 김 부총리의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김 부총리가 지금 교육문제를 갖고 도박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공영형 혁신학교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 상품이다. 제품의 질은 물론 학부모나 학생의 반응도 예측하기 어렵다. 반면 자사고나 특목고는 이미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학교들은 정권이 불변의 진리처럼 받드는 '3불(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불가)정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해왔다. 학생 선택권을 보장하고, 수월성 교육의 모델이 됐다.

    김 부총리는 외고를 마치 현행 사교육의 근원인 것처럼 지목하지만 내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학생들이 외고에 가려는 건 그만큼 얻을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외고를 대신해 공영형 혁신학교를 택하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백번 양보해 김 부총리의 주장을 이해한다 해도 추진 방식에 문제가 있다. 교육제도 변경은 3년 정도 시간 여유를 두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외고 입시 자격 제한은 2008학년도 입시부터 적용한다. 지금 중학교 2학년 학생부터다. 외고 입시를 준비했던 학생과 학부모가 반발하는 건 당연하다.

    외고의 학생 모집 지역을 정하는 권한(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0조)은 시·도교육청에 있다. 따라서 시·도교육청과 상의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교육부는 나중에 설득하려 했다지만 서울시교육청은 "외고 모집을 현행대로 하겠다"며 반발하고 있지 않은가.

    김 부총리의 공영형 혁신학교 추진 배경에 대해선 다른 해석도 나온다. 학교 이름에 공무원 교육기관에나 붙일 법한 '혁신'을 붙인 것이 어울리지 않아서다. 혁신은 노무현 정권이 내세운 대표적 슬로건이다. 그래서 '정권과의 코드 맞추기'로 보는 시각이 있다.

    외고나 공영형 혁신학교가 아니라도 노무현 정부의 교육정책은 표류하고 있다. 교원평가제, 방과 후 학교 도입 등 하는 일마다 현장에서 반발에 부닥치고 있다. 대통령 직속 교육혁신위원회는 5개월간 교원 승진·임용 개선 방안을 논의하다 결론을 못 내렸다. 김 부총리는 다음 정권, 혹은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생각해 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