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 '세상만사'란에 이 신문 성기철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경기고 및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내무부 새마을 담당관, 강원부지사, 전남지사, 대통령 정무수석,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12대 국회의원(전북 군산-옥구), 내무부 장관, 서울시장(관선), 명지대 총장, 국무총리, 서울시장(민선),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 전 국무총리의 이력이다. 이처럼 화려한 관직을 거친 사람이 또 있을까. 대통령을 빼곤 안 해본 게 없다고 할 그가 마침내 출전 채비를 시작했다. 국민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과 더불어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으니 대통령 꿈을 꿀만도 하다. 범여권 후보로 상정할 경우 현재로선 1인독주 양상이다.
고 전 총리는 국회의원을 지냈음에도 정치인보다 행정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가 유능한 행정가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30대 초반이던 ‘정부 새마을운동 실무협의회’ 의장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37세 젊은 나이에 차관급인 전남지사에 발탁돼 대과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관운이 좋았던 탓도 있겠지만 장관을 세 번이나 역임하고, 서울시장과 국무총리를 두 번씩 지냈다.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로서 7명의 대통령을 모신 진기록 보유자다. 여러 정권에서 고위직을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해바라기 공직자’로 폄하해서는 안될 일이다. 일찌감치 ‘행정의 달인’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총리 때인 2004년 탄핵 파동 당시 대통령과 총리를 차라리 바꾸는게 낫겠다는 여론도 있었으니 대통령직 수행 능력을 어느정도 갖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에게 대권 고지가 너무 높아 보인다.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돌파력을 갖췄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그는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참여 여부를 심하게 저울질했다. 수개월 동안 “나라가 이래선 안된다”는 아리송한 말만 되풀이하다 결국 참여를 포기했다.
이런 그를 두고 여당의 참패만 손꼽아 기다렸다는 분석을 낳게 했다. 선거가 끝나자 관심은 곧바로 고 전 총리에게 쏠렸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답은 7∼8월 중에 ‘희망한국 국민연대’(가칭)를 결성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정치인을 가급적 배제하고 전문가 중심의 조직을 만들겠단다. 좌고우면이 계속되면서 정치권에선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의원 꼴 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3당 합당을 결행한 김영삼 전 대통령, 정계복귀 명분을 찾기 위해 1995년 지방선거전에 과감히 뛰어든 김대중 전 대통령, 추락한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 단일화 추진을 전격 수용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돌파력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고 전 총리의 소극적인 행보 자체를 제3자가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이면에 자신의 대선 전략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정치적 노선, 혹은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아 국민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 전 총리가 내놓은 노선은 ‘중도개혁 실용주의’다. 그럴듯해 보인다. 정치학 사전에도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얼 지향하고 있으며, 어떤 정치세력을 토대로 실현하겠다는 것인지 아무런 청사진이 없어 답답하다.
정치권에선 대체로 한나라당을 포위하는 범여권 신당 창당을 구상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 판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그분은 성향이나 지내온 과정을 볼 때 한나라당과 더 잘 어울리는 분”이라고 말할 지경이니 국민들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고 전 총리의 싱크탱그 ‘미래와 경제 포럼’ 핵심 멤버인 최열 환경재단 대표가 한나라당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의 시장직 인수위원장을 맡게 되자 정체성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고 전 총리가 진정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대통령이 되겠다면 자신의 노선부터 분명히 밝혀야 한다. 여러 정치세력에 기대어 눈치만 살피는 정치를 할 요량이면 국민을 위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낫다. 우리 국민은 애매모호함을 싫어한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