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선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한나라당의 오세훈 후보가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세훈씨의 당선이 과연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고 한나라당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씨의 당선이 결코 한국 보수의 승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한국 보수의 좌절일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는 다른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와는 다르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시장 선거는 정치적 중요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강금실 후보와 오세훈 후보 사이의 선거에는 그런 것이 없다. 한사람은 소속 정당이 열린우리당이고 또 한사람은 한나라당이라는 것과, 한사람은 여자이고 또 한사람은 남자라는 것 밖에 다른 것이 없다. 두 사람이 유니폼 같은 것을 입고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라기 보단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모습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한국 보수의 책임이다. 한국의 보수는 자신들이 원하는 후보를 세우도록 한나라당에 압력을 넣지 못했다. 그 점에서 한국의 보수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그들이 생각하는 보수정치인으로의 자격 기준, 즉 ‘리트머스 테스트’를 설정하지도 못했다. 그것을 정하지 못했으니 한나라당이 그것을 공천에 반영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없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예비선거에선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먼저 두각을 나타냈었다. 여론조사는 매케인이 당시 부통령이며 민주당 후보로 유력했던 앨 고어를 쉽게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공화당 골수당원들은 매케인의 정치적 성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매케인은 ‘리트머스 테스트’에서 실격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지 부시가 후보가 된 것이고, 공화당은 매우 힘든 선거전을 치른 끝에 간신히 승리했다.

    지금 한나라당엔 미국 공화당에서 볼 수 있는 보수 철학과 보수 정책이 없다. 한나라당은 알쏭달쏭한 여론조사, 그것도 자기들이 하지도 않은 여론조사를 믿고 오세훈씨를 후보로 내세웠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는 그런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강금실씨의 당선만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씨의 당선이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세력으로서의 보수가 실종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후보가 된 오씨는 이런저런 공약을 내세웠고 언론은 그것을 두고 기사를 써댔다. 하지만 공약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후보자가 살아온 길이다. 사람은 지난날의 행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지 공약이란 번지르르 한 말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탤런트 같이 광고에 출연한 오씨는 그것 하나로 보수 정치인으로서는 실격이다. 보수 정치인의 덕목(德目)은 원칙(principles)과 일관성(integrity)이지 그런 이미지가 아니다.

    오씨가 걸어온 길은 보수 정치의 노선과는 정반대이다. 오씨는 자기가 환경운동가라면서 환경운동연합에 속해 있음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그러나 환경운동연합은 단순히 자연을 사랑하고 야생을 보호하자는 주장을 하는 단체가 아니다. 환경운동연합은 불법적인 낙선운동에 간여했고, 2002년 여중생 압사 사건과 요즘의 평택 시위를 주도한 범대위에 참여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의 강령 중 특히 비중이 큰 것은 반핵 운동이다. 환경운동연합이 원자력 발전에 대해 절대적 반대를 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 발전량 중에서 원자력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60%가 넘어서 프랑스 일본과 더불어 그 비중이 가장 높다. 물론 원자력에 반대하는 사람이 서울 시장에 당선될 수도 있지만, 그런 시장은 좌파 시장이어야 한다. 원자력 반대는 좌파의 중요한 아젠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씨는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한나라당 소속인 것이다. 평택 시위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평택 사건은 우리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인데, 이 시위에 가담한 단체에 오씨가 속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오씨는 ‘트로이의 목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기아자동차가 부도를 냈다. 그 때 한나라당 후보이던 이회창씨는 기아자동차 공장을 찾아가서 기아차가 ‘국민기업’이라면서 반드시 살려내겠다고 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시장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고 경제위기가 닥쳐 온 것이다. 당시 부총리였던 강경식씨와 경제수석이었던 김인호씨는 이회창씨의 기아차 방문으로 정부는 기아 사태를 처리할 레버리지를 잃어 버렸다고 훗날 밝혔다. 2002년 이회창씨는 여중생 사망사건을 반미로 몰고 가는 좌경 세력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는커녕 초라하게 촛불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두 번에 걸친 이회창씨의 실패는 이 두 사건에서 예고됐던 것이다.

    나는 한나라당과 한국의 보수가 이 두 번의 실패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트로이의 목마’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가릿 대처가 영국의 총리로 취임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영국의 자동차 업계가 일본차의 수입을 막아 달라고 요구하자 대처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수입된 일본차와 경쟁할 수 없다면 망해야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부르자 뉴욕타임스 등 진보언론은 레이건이 외교를 모른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레이건은 악을 악으로 지칭하지 못하면 세상의 올바르게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대처와 레이건이 옳았음을 깨닫는데는 오래 세월을 요하지 않았다. 오세훈씨의 경우를 보면서 오늘날 한국에 과연 ‘보수’가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상돈 객원칼럼니스트/중앙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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