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 공천 비리는 예정된 사고라고들 말한다. 중앙당이 공천권을 시·도당에 넘겨줄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것이다. 공천혁명이라는 말은 단순 명쾌하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정치현실은 훨씬 복잡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초(超)강세를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공천장이 당선 보증수표처럼 여겨지는 지역도 적지 않다. 이런 수표의 발행권을 현역 의원과 원외 위원장 243명이 골고루 나눠 가진 것이 공천혁명이다. 그 주변에 사람들이 꼬이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면 사단이 나게 마련이다. 요컨대 한나라당 지도부가 ‘좋은 의도’로 도입한 새 공천 제도가 결과적으로 비리를 불러들였다는 분석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다른 정당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며 흐지부지 넘어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경우가 다르다. 한나라당은 ‘돈 선거’에 대한 전과(前科)가 있다. 오래전도 아니다. 불과 2년 전 일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차떼기 대선자금 문제가 터졌다. 그 일로 한나라당은 간판을 내릴 뻔했다. 국민에게 용서를 빈다면서 수백 억짜리 빌딩을 내놓고 천막으로 당사를 옮겨야 했다. 당 대표는 명동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올리고, 영락교회에서 참회예배를 드리고, 조계사에 가서 108배(拜)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택시를 탔다가 “정치 쇼 하지 말라”는 핀잔도 들었다.

    선거 후에도 수모는 계속됐다. 지난 2년간 한나라당은 시도 때도 없이 ‘부패정당’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국회 답변을 하는 국무총리가 한나라당 의원에게 “차떼기당을 나쁜 당이라고 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호통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런 세월을 겪고 나면 ‘돈 선거’ 얘기만 들어도 흠칫 놀랄 것 같다는 게 보통 사람들의 심정이다. 누군가 검은 유혹을 뻗쳐 와도 “사람 잡으려고 하느냐”고 펄쩍 뛰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한나라당 사람들이 공천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지방의원 공천권은 수억대, 시장·군수 공천권은 10억대였다는 말이 돌아다닌다. 물론 소문은 부풀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 나는 굴뚝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 법이다. 한나라당 전직 의원은 지난달 말 홈페이지에 “공천권을 가진 사람들은 지금 권력의 묘미를 만끽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주일 뒤, 한 달 뒤에 벌어질 일을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고 썼다. 그런 경고를 하게 만든 사정이 있었다는 얘기다.

    한나라당 공천 비리가 불거진 후에도 정당 지지율엔 큰 변화가 없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 대표의 ‘경악할 비리’ 폭로 예고가 헛발질로 드러나면서 물타기 효과도 나타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방선거 판도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모양이다. 그러나 이번 일이 국민들에게 한나라당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던져 준 것만은 분명하다.

    가령 어떤 학생이 시험시간에 부정행위를 하다가 적발돼 정학을 당하고 그래서 부모님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고 치자. 그런 학생이 다시 남의 답안지에 눈길을 돌린다면 머리가 나쁘거나 심성이 삐뚤어진 아이 아니냐는 얘기를 듣게 마련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공천을 미끼로 돈을 받았다는 뉴스에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는 소감이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돈 선거 때문에 그렇게 난리를 겪어 놓고도 똑같은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그 마음가짐이 섬뜩하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국민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남의 과거사(過去事)를 헤집는 사람들에게 신물이 났지만, 자기 과거사에서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 역시 믿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2년 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머리를 조아려 사과한 일을 까맣게 잊었는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믿고 국가 운영을 맡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