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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 '중앙포럼'란에 이 신문 김진국 논설위원이 쓴 '자기 색깔 필요한 40대 기수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야수파는 '색의 혁명'을 의미한다. 자연의 색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감성을 색으로 표현했다. 자연의 빛을 모방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야수파는 1905년 파리의 가을 살롱전 이후 겨우 3년간 이어졌지만 현대 미술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다. 평면 미술의 두 요소가 형태와 색이다. 이 가운데 형태를 파괴한 사람이 입체파의 피카소라면 색을 파괴한 사람이 야수파의 마티스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야수파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야수파의 강렬한 원색에는 전율과 같은 힘이 담겨 있다. 이 힘은 태양 대신 지구를 돌리는 것 같은 발상의 전환,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나온다.
3류, 4류 취급을 받는 정치라고 예외는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비전을 보여줘야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 그게 안 되면 최소한 대중이 갈구하는 게 뭔지 빨리 읽고, 거기에 맞춰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한 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40대 기수론'이란 것도 그렇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처음 40대 기수론을 외칠 당시 국민적 요구가 절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체제에 들어가고 야당 지도부는 사쿠라 논란에 휘말려 있었다. 군사정부에 정면으로 맞설 패기 있는 야당 지도자에 대한 대망론이 있었다. 이걸 업었기에 양김 시대가 있었다.
설 민심은 냉랭했다. 정치권을 비난하기에도 지쳐 관심을 거두었다고 한다. 야당에 희망을 거는 것도 아니다. 특히 열린우리당의 처지는 너무 답답하다. 현 정부 들어 27번의 선거에서 모두 졌다. 5월에 또 선거를 치러야 한다. 누가 앞장설지 막막하다. 지지도가 한 자릿수를 넘는 이가 없다. 절망적인 패배의식이 팽배하다. 그런 가운데 이전투구 조짐까지 보인다. '40대 기수론'에 눈길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실망이다. 소위 '빅2'(정동영.김근태)를 흉내 내는 것도 벅차 보인다. 왜 40대여야 하는지, 굳이 생물학적으로 나누어 40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있다면 '빅2'의 지지도가 너무 낮은 데 따른 대안론 정도다. 하지만 그 대안이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 설득하지 못한다. 그나마 대안으로 나설 용기라도 있으면 나은 편이다. 나이나 선수 등 서열을 뒤집자는 것이 40대 기수론이다. 그러면서 계파에 줄을 서고, 큰 후보의 어젠다를 쫓아다니며 찬성, 반대를 외치는 것으로는 결코 차례가 오지 않는다. 비전 없는 2등은 영원한 2류일 뿐이다.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가 바람을 일으키자 '한국의 블레어'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많았다. 박정희 향수를 타고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 희극도 보였다. 그러나 내용 없는 흉내는 실속 없는 조롱거리다. 존 F 케네디, 토니 블레어, 빌 클린턴…, 최근에도 데이비드 캐머런, 스티븐 하퍼, 앙겔라 메르켈 등 수많은 40대 돌풍의 주인공이 있지만 그들의 힘은 생물학적 나이에서 나온 게 아니다. 과거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유권자가 답답해 하는 부분에 명쾌한 해법과 비전을 제시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기초를 다진 피카소는 스무 살이 넘어 시작한 마티스의 그림을 처음 보고 6개월간 붓을 잡을 수 없었다. 바다를 파란색으로, 나무를 초록색으로 칠하는 것은 나이와 연륜이다. 하지만 바다에 열정의 빨강, 하늘에 행복의 분홍을 칠하는 마티스들이 보고 싶다. 그래야 관전자들도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