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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국제면 '강인선칼럼'란에 이 신문 강인선 기자가 쓴 '한 보수재단의 이름다운 퇴장'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기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 언젠가 신문에서 ‘존 올린(Olin) 재단’이 몇 가지 프로젝트에 대한 재정지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다가 왠지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유명 기업인이었던 존 올린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이 재단은 보수적인 학자들과 연구소에 적극적인 재정지원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이 장수하고 싶은 것처럼, 조직도 계속 그 생명력을 유지하며 확대해가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왜 올린 재단은 스스로 문을 닫아버린 것일까.
올린 재단의 웹사이트를 찾아가 보았더니, ‘이 재단은 문을 닫았다’는 안내문이 썰렁하게 남아 있었다. 그 안내문은 마치 ‘유서’ 같았다.
“존 올린은 자신의 재단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박애주의적인 이념을 잘 이해하는 이사들이 은퇴할 때 재단도 문을 닫기를 원했다. 지난 2000년 올린이 재단 이사장으로 선정한 윌리엄 사이몬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이사회는 그후 몇 년에 걸쳐 재단을 폐지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올린은 이 재단이 자신의 사후에 방향을 잃고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1953년에 설립된 재단은 올린의 뜻에 따라 50년 남짓한 역사 동안 3억7000만달러를 세상에 나누어주고 2005년 말 사라졌다. 올린 재단은 오늘날 미국사회의 담론을 주도하는 보수주의를 인내심 있게 키워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기관이다. 이 재단이 갖고 있던 재원은 자선사업과 학술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포드 재단(110억 달러)이나 게이츠 재단(270억 달러)에 비하면 미미했지만, 그 영향력은 지대했다.
1960~70년대를 지나면서 올린은 자유기업과 미국 헌법에 기초한 미국사회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근본 원칙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 세력들이 대학과 정부, 언론에 포진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기업, 작은 정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지식인 전사’를 키워내는 데 그의 재산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카네기가 그랬고, 포드와 록펠러가 그랬던 것처럼, 올린도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는 삶에서 부를 나눠주는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보수주의 운동이란 ‘지적 빈민굴’이나 다름없었다. 올린은 이념이 어떤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두터운 지식인층과 탄탄한 재정지원이 필수라는 믿음 속에 ‘보수주의의 벤처 캐피털리스트’로 변신했다.
그 결과 하버드 등 미국 유명대학의 법과 대학원과 경제학과에는 올린의 이름을 딴 프로그램이 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사법계의 핵심 권력으로 부상한 보수 성향 법률가들의 모임인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Federalist Society)’ 창설에도 직접 기여했다.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하버드대학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도 한때 하버드의 올린 연구소를 이끌었고, ‘역사의 종언’을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그 책의 출발점이 됐던 글을 올린 재단이 지원하는 잡지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실었다.
올린 재단은 오늘날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기초를 닦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수든 진보든 그 아이디어가 새롭고 정교하게 발전되지 못하면 쇠퇴하게 마련임을 알고, 신념과 열정, 돈을 과감하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