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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가 쓴 '김영희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 거는 청와대와 정부의 기대가 높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누가 뭐래도 한국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귀'에 직접 핵문제 해결의 중요성과 남북관계 진전의 유익함을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DJ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사실이다. 그러니 6자회담의 재개가 불투명하고 북미 간에 험악한 말이 빈번하게 교환되는 이 시기에 김대중 김정일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막힌 데를 뚫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DJ의 평양 방문 구상에는 개인적인 야망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에 질적 변화를 가져와 한반도 평화 만들기에 필요한 주춧돌을 놓은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 공로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런 그가 한반도 평화의 여정(旅程)을 가로막고 있는 핵문제 해결에 일조하여 2000년 6.15 정신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인 김대중의 인지상정으로 이해된다. 그의 욕심은 평양에 가되 복구된 경의선을 달리는 첫 번째 기차를 타고 가겠다는 희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대통령일 때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철의 실크로드라는 낭만적인 아이디어에 매혹됐었다. 한반도에 평화가 오면 부산을 출발한 기차가 평양과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대륙 최남단까지 달리는 꿈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꿈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다. DJ는 과연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지난해 6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 위원장에게 200만㎾ 전력공급안의 선물을 주고 정상회담 복귀를 약속받은 것 이상의 성과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북한이 6자회담 참석을 주저하는 원인의 절반은 미국에 있다. 부시 정부는 주로 국내정치적인 이유로 인권과 위폐 문제를 가지고 북한을 계속 자극하고 압박한다. 워싱턴과 버시바우 주한대사의 입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대북 강경발언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DJ가 김 위원장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기껏 할 말은 회담 테이블에 나와서 하라는 정도일 것이다. 바람직하기로는 DJ가 워싱턴에 가서 미국의 입단속부터 하고 평양을 가는 게 좋겠지만 2001년 3월 김대중 부시 회담이 재앙(Disaster)으로 끝난 이후 DJ는 부시 정부의 신뢰를 잃고 있다.
DJ 스스로 김 위원장과의 대화 의제를 실용적으로 잡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그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면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끼리 미국에 대한 대응, 6자회담 상설화 문제, 북한에 대한 외부세계의 비판, 21세기 한민족의 위상과 목표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적인 통일의 진행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사람끼리"의 비공식 대화는 나쁠 것이 없다. 자신의 방북에 대한 국민의 기대수준이 올라가는 것을 경계하는 데서 정치 9단의 노회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경계할 것이 있다. 남북연합에 대한 그의 집착이다. DJ는 3단계 통일방안의 첫 단계인 남북연합제는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것이어서 하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6자회담이 성공하여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회담으로 발전하면 남북연합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남북연합은 한반도 평화체제가 성립된 후 논의할 문제다. 서두를 일이 아니다. 정부 고위 소식통도 남북연합제는 DJ가 평양 가서 합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비용 대 성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김 위원장 '친구'의 방북은 좋다. 그러나 DJ는 청사(靑史)에 남을 자신의 이름에 한 줄 더 보태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동시에 방북이 지방선거를 앞둔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인기 만회에 이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