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중앙포럼'에 이 신문 정치부 전영기 차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을 '범죄 정권'으로 표현한 버시바우 미국 대사는 요즘 마음고생이 심하다. 북한 당국이 대사를 한국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것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한국 집권당의 3선 중진인 김원웅(대전 대덕) 의원이 여기에 동조한 것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이젠 김원기 국회의장까지 버시바우의 언행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대사가 서울에 파견된 역사는 122년이다. 대한민국 건국사보다 길다. 역대 미국 대사 28명 가운데 국회의원에게서 공공연히 추방 위협을 받은 사람은 버시바우가 유일할 것이다.

    대사의 마음고생은 '범죄 정권'이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버시바우는 부시 대통령이 썼던 '악의 축'이나 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와 달리 자기 표현이 실무적이고 법적인 용어라고 믿고 있다.

    다만 실무적이고 법적인 의도였다면 정치성 짙은 범죄 정권(Criminal regime)이란 표현은 자제했어야 했다. 의도와 표현이 불일치하기에 실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경위는 이렇다. 열흘 전 중견 신문기자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토론회에 참석했다. 부임한 지 두 달도 안 된 시점이다. 13분 기조연설 뒤 40분가량 일문일답이 진행됐다. 남북한과 미국 관계의 현안에 대해 10개 이상의 질문이 쏟아졌다.

    범죄 정권 언급은 그중 한 질의응답에서 나왔다. 북한의 특정 '범죄 활동(Criminal activity)'들이 미국 국내법에 따라 엄중하게 제재받고 있음을 강조하다 나온 얘기였다. '범죄 활동들이 모이면 범죄 정권이 된다'는 형식논리였다. 기자의 질문이 좀 공격적이어서 버시바우의 표현이 거칠어진 측면도 있다고 한다. 

    다른 답변들에서 대사는 온건하고 전향적인 대북자세를 취했다. 예컨대 "북한 정권이 실패했지만 개혁 가능성에 희망이 있다""(북한의 인권 상황이) 하루아침에 변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한 지도자가 과오를 범했을지라도 변화를 일굴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등이다.

    큰 그림과 전체적인 메시지에 주목한다면 대사의 발언은 의도된 행동이 아니다. 워싱턴과 긴밀한 교감 속에 나온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의도성과 워싱턴 커넥션이 불필요하게 증폭되고 있다. 이유가 뭘까. 한 개비 성냥불을 순식간에 들불로 번지게 하는 성마르고 메마른 한국 사회의 정쟁성 때문일까. 

    극단적인 반미세력들은 미국 대사의 발언을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이고 침략적인 속성을 증명하는 교재로 삼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발언이 우발적인 실수여선 곤란하다. 워싱턴과 탄탄한 커넥션을 가진 의도된 발언이어야 반미 정서를 자극하는 효과가 크다.

    반대로 극단적인 반노 세력들은 범죄 정권마저 두둔하는 노무현 정부의 도덕적 파탄을 폭로하고 싶어한다. 폭로의 효과가 커지려면 대사의 발언은 개인의 얘기여선 곤란하다. 그래서 미국 정부의 정교한 계획에 따른 의도된 실수라고 한다. 두 집단 모두 대사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버시바우는 그들의 정치 목표를 위한 소도구일 뿐이다. 

    한국과 북한, 미국에서 전개되는 버시바우의 범죄 정권 논란은 허수아비 싸움이다. 진의와 실체를 빼놓은 채 허깨비를 향해 주먹질을 해대는 꼴이다. 대사의 발언은 원래의 실무적 법적 수준으로 쿨하게 내려와야 한다.

    평생 러시아 유럽 쪽 일만 맡아온 버시바우도 한국의 다이내믹하고 휘발성 강한 정쟁문화를 섬세하게 이해했으면 한다. 한국의 인적 네트워크를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친미인사들에게서 더 넓고 다양한 사람으로 확충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