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3일자 오피니어면 '광화문에서'란에 이 신문 이인철 교육생활부 차장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저 소나무가 그냥 아무렇게나 심은 거 같지만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나름대로 철학이 있어요. 애기(학생)들이 저 나무나 연못을 바라보다가 문뜩 좋은 시상(詩想)이라도 떠오른다면 그게 보람이지요.”

    6월 ‘수학의 정석’ 저자로 유명한 홍성대 씨가 이사장인 상산학원의 전북 전주 상산고에 취재를 갔을 때 받은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홍 이사장은 동양화 속에 나옴 직한 나무들, 팔뚝만 한 금붕어가 뛰노는 연못과 넓은 잔디밭이 어우러진 교정 곳곳을 안내하며 무척 뿌듯해했다. 

    그가 1981년부터 학교에 쏟은 사재만도 1000억 원은 족히 된다. 자립형 사립고 시범학교로 지정되자 120억 원을 들여 최신식 강당과 도서관을 지었고 지금도 100억 원을 들여 기숙사를 짓고 있다. 길을 가다가 금붕어가 탐이 나 700만 원어치나 주문해 연못에 넣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를 모셔다 독서토론회를 열거나 러시아 오케스트라의 음악회를 여는 등 학교 곳곳에 문화의 향기가 흐르도록 노력했다. 지금은 전국에서 학생이 몰려들 정도로 유명한 학교가 됐다. 

    그런 홍 이사장도 “내가 바라는 교육다운 교육 하고 싶어 학교를 세웠는데 사학법 개정이니 귀족 학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정나미가 떨어져 단돈 10원도 쓰고 싶지 않다”고 허탈해했다. 

    홍 이사장 말고도 우리 교육계에는 남다른 열정으로 육영사업에 헌신하고 있는 사학인이 많다. 그러나 설마 했던 사학법 통과가 현실로 나타나자 사학단체들은 의욕을 잃고 ‘분신’과도 같은 학교 폐쇄까지 거론하고 있다. 

    여당은 개방형 이사제가 사학 비리 근절을 위한 ‘안전장치’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직화한 소수가 ‘주인 없는 학교’로 만들어 지배구조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지금도 비리 사학은 얼마든지 처벌이 가능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해 아예 학교의 경영권을 몰수할 수도 있다. 과잉 입법으로 극소수의 비리를 전체인 양 침소봉대해 전체 사학을 옥죈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수도권의 한 이사장은 “사학의 비리나 캐려고 색안경을 끼고 들어온 개방형 이사와 농담 한번 할 수 있겠느냐. 무한한 투자의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풍토에서 누가 사학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한국 교육의 역사는 사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8·15광복, 6·25전쟁 등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수많은 독지가와 종교계 지도자들이 사재를 털어 전국 곳곳에 학교를 세웠다. 정부의 권유에 집안 땅을 몽땅 팔아 육영사업에 뛰어든 이들도 많다. 중학교 22.7%, 고교 46.1%, 대학 81.5%가 사립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사학 설립자들이 다른 곳에 돈을 쓰지 않고 학교를 세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사학법을 통과시킨 국회의원이나 사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도 사학의 덕을 본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 말이다. 

    사학단체들은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워서는 안 된다”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여당 의원들이 사학법 처리에 성공한 뒤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불렀다니 그런 ‘희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