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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강천석 칼럼'에 이 신문 강천석 논설위원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함석헌(1901~1989·종교인·사상가) 선생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앰비셔스(ambitious)’라는 영어 단어다. 남쪽 그 시골 중학을 나온 내 또래들이 대충 그렇다. 연유가 있어서다. 1960년대 초니까, 40년도 훨씬 더 된 옛일이다. 그때 그 학교에선 두어 달에 한 번씩 아침 조회 때 서울에서 유명하다 하는 선생님을 모셔다 강연을 듣곤 했다.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 차림의 선생이 어린 촌놈들의 얼을 쏙 빼버린 것도 그 강연에서다. 그때 선생이 하신 말씀은 모두 세월속에 흩어져 버리고, ‘앰비셔스’라는 영어 단어 하나만 그 시절 추억의 가지에 달랑 매달려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거기서도 지독하게 더 가난했던 시골 중학생들 어깨에 선생은 “소년들이여, 큰 뜻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라는 말씀을 얹어주셨다.
사단(事端)은 선생이 ‘앰비셔스’의 ‘앰’ 소리에 잔뜩 힘을 넣어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달 일제고사 영어 시험에서 우리 대부분이 ‘앰비셔스’의 악센트 문제를 틀려 버린 것은 온전히 선생 탓이었다. 진짜 악센트는 ‘앰’이 아니라 ‘비’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 후 자신의 이 중대과오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는 말 한마디 보내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선생을 용서하고, 선생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을 사서 돌려가며 읽었다. 우리의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라, 선생의 그 강연이 그만큼 어린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요즘 그 함 선생을 다시 읽고 있다.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에 흰수염을 늘어뜨린 그 노인이 어떻게 어린 촌놈들의 얼을 빼놓고 어떻게 그들의 혼을 뒤흔들어 놓았던가가 궁금해서다. 물론 진짜 이유는 달리 있다. 좌우의 멱살잡이 시국 때문이다. 정권 잡은 좌는 우 대하기를 부모 죽인 원수 대하듯 하고, 권력의 몽둥이 찜질을 받고 있는 우는 좌 보기를 똥·오줌·고름 보듯 하고 있는 요즘이다. 해방 정국과 6·25사변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이다. 4·19 때도 5·16 때도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는 하지 않았다. 민족이 두 쪽으로 갈렸는데, 그 남쪽 절반이 다시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대통령도 대통령이 아니다. 핏발 선, 살기 띤, 주먹 쥔 한쪽의 대장일 뿐이다. 스스로도 그리 행동하고, 맞선 쪽도 그리 대접한다. 이게 어디, 나라인가. 그러면서 남북을 오가며 말끝마다 민족 화해와 민족 통일을 달고 다닌다.
못난 놈이 제 조상 자랑하고, 못된 놈이 남의 조상 뫼 파헤친다더니, 완전히 그 꼴이 났다. 신부님·목사님·스님·역사과목 훈장들이 총출동해 벌인다는 과거사 파티가 과거사 난장판 꼬락서니가 되고 말리라는 것은 누구 눈에도 훤히 보이는 일이다. 일제 때 식량 공출에 앞장섰다는 전 면장은 오른쪽에 올려 놓고, 6·25 때 죽창으로 동네 사람 배를 쑤셔 죽인 전 남로당원은 왼쪽에 올려놔, 어떤 저울로 그들의 죄를 달겠다는 것인지 정신이 성한 사람으로선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답답한 건 나라가 이 지경인데도 ‘귀신 씐 좌’와 ‘문드러진 우’를 넘어설 새 말씀, 새 사상, 새 지평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이 목마를 수밖에 없다. 목이 마른데도 샘이 없으면, 제 손으로 우물을 파 목을 축일 도리밖에 없다. 그 목마름으로 함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꿈틀거리는 백성이라야 산다” “두려워 말고 외치라”를 읽는 것이다. 이제 보니 선생이 나라의 되어나가는 길을 잘못 짚고 세계의 운행 방향을 잘못 내다본 대목도 적지 않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50년 전, 40년 전, 30년 전 선생의 그 목소리가 세월을 건너뛰어 아직도 쿵쿵거리는 심장을 단 채 힘차게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이 기적은 ‘내 탓이오’라는 고백의 기적이다.
지금 이 나라 싸움판은 누가 먼저 ‘내 탓이오’를 외칠 줄 아는가에 승부가 결판나는 싸움판이다. 좌를 징그러운 똥·오줌·고름 대하듯 하는 우가 그것이 썩은 제 뱃속에 담겨 있던 똥·오줌이고 문드러진 제 살 속에 박혔던 고름임을 먼저 고백할 것인가, 아니면 우를 제 부모 죽인 원수로 아는 좌가 잡귀신에 씌어 눈알이 뒤집혔었다는 걸 먼저 고백할 것인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한쪽만 고백하면 먼저 고백하는 쪽이 이기고, 양쪽 다 고백 기회를 놓치면 둘은 물론 나라까지 결딴나고 말고, 양쪽이 동시에 고백하면 민족과 나라와 백성이 모두 함께 사는 것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던 함 선생 말씀 속의 ‘생각하는 백성’이 지켜봐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