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발령한 경고음국가경제가 마른 비만형으로 지구가 돌 듯, 경기 사이클도 돈다
  • ▲ 네덜란드 병은 마른 비만이다. 나라경제가 팔다리는 앙상하고 배만 볼록 나온 체형이 되는 것이다. 몸 전체가 고루 뚱뚱한 체형보다 바른 비만이 더 위험하다는 게 의학 상식이다. ⓒ 챗GPT
    ▲ 네덜란드 병은 마른 비만이다. 나라경제가 팔다리는 앙상하고 배만 볼록 나온 체형이 되는 것이다. 몸 전체가 고루 뚱뚱한 체형보다 바른 비만이 더 위험하다는 게 의학 상식이다. ⓒ 챗GPT
    ■ 삼전닉스 호황이 주는 경고음

    한국이 반도체 수출로 돈을 너무 많이 벌어 걱정이라면 말이 될까? 
    얼핏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특정 산업의 지나친 성공이 역설적으로 국가경제 근육을 약하게 할 수 있다. 
    바로《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이다.  
     
    1959년 네덜란드는 북부 흐로닝언에서 거대한 천연가스전을 발견했다. 
    가스 수출로 막대한 외화가 들어오자, 네덜란드의 길더화 가치가 상승했다. 
    자국 통화가 강해지자, 네덜란드 제조업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됐다. 
    자본과 인적자원까지 가스산업으로 몰리면서 가스산업은 풍요로워졌지만, 네덜란드 국가경제 전체의 근육은 오히려 약해지고 말았다.  
     
    한국은행이 공식보고서를 통해, 한국 경제가《편향적 성장》으로 인해《네덜란드병》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필자는 이미 한국 경제의《편향적 성장》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   

     
    ■ 오늘 풍년이 내일도 계속될까

    한국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AI 열풍으로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국의 국내총소득(GDI)은 국내총생산(GDP)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했다. 
    이는 같은 양의 반도체를 팔고도 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인해 더 많은 원유와 원자재-장비를 살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교역조건 개선이 가져온 축복이다. 
    교역조건은 쉽게 말해수출품 한 단위로 수입품을 얼마나 살 수 있는가를 뜻한다. 
    반도체 가격이 오르고 원유·원자재 가격이 안정되면, 교역조건은 개선된다. 
    반대로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거나 에너지와 핵심 장비 가격이 오르면, 교역조건은 악화된다.  
     
    문제는 현재의 교역조건이 미래에도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반도체 쏠림이 심해질수록 장기적으로 교역조건이 악화될 위험이 커질 것이다. 


    ■ 경쟁적 반도체 설비투자 열풍

    대규모 반도체 설비투자가 세계적인 추세다. 
    《삼전닉스》뿐 아니라 미국·대만·중국 기업들도 AI 반도체와 메모리 생산능력을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다. 

    모든 기업이 현재의 높은 가격이 계속될 것으로 믿고 공장을 지으면 몇 년 뒤에는 공급이 수요를 앞설 수 있다. 
    수요초과가 공급초과로 바뀌는 게 바로《사이클》이다. 
     
    반도체 공급이 과도하게 늘어나 가격이 떨어지면, 한국은 더 많은 반도체를 수출하고도 이전보다 적은 원유와 원자재를 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수출이 늘고 GDP가 성장하는데, 수출가격 하락으로 실질구매력과 GDI가 오히려 부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궁핍화 성장맥락에 닿는다. 
    예를 들면, 콜롬비아가 커피 생산을 늘리면 커피의 국제가격이 하락해 콜롬비아 국민들의 구매력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교역조건 악화 때문이다.  
     
    당장 세계 반도체 가격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 짚을 건,사이클》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갈릴레오가 지구가 돈다고 했듯, 경기도 돈다. 

    당연히 반도체 수요도 돈다. 
    더구나 한국을 비롯 여러나라들이 동시에 반도체 생산설비를 늘리고 있는 마당에, 반도체 가격하락 가능성을 말하는 건 비아냥이 될 수 없다.   

     
    ■ 배만 불쑥하고 팔다리는 빼빼 말라

    수입 측면에서도 위험이 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은 첨단 제조장비와 핵심 소재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한다. 
    반도체 공장을 늘릴수록 외국산 장비와 에너지 수입도 함께 증가한다. 

    호황기에는 높은 반도체 가격이 이 비용을 충분히 상쇄하지만,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고 장비·원유 가격이 상승하면 수출가격의 내림세와 수입가격의 오름세 속에 한국은 이중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교역조건이 순식간에 악화되는 것이다. 
     
    산업 편중은 이러한 위험을 더욱 키운다. 
    자본과 우수 인력이 반도체로 몰리면 자동차·기계·화학·바이오·조선·콘텐츠 같은 다른 수출산업의 혁신 기반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훗날 반도체 가격이 하락해도 이를 대신해 외화를 벌어줄 산업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네덜란드병》의 본질은 특정산업이 잘나가는 데 있지 않다. 
    나머지 산업이 말라가는 데 있다


    ■ 가속화되는 자산 양극화

    고용과 분배 문제도 심각하다. 
    제조업 생산에서 IT 부문의 비중은 급증했지만, 고용 비중은 그다지 높지 못하다. 
    반도체 기업에서 고액 연봉을 받은 이들 또는 반도체 관련 주식을 통해 자산증식에 성공한 이들만 호황의 과실을 누린다.

    반면 자영업자와 전통 제조업 종사자들은 성장의 온기를 체감하기 어렵다. 
    GDP는 높아졌는데, 중산층이 도리어 얇아질 수 있다.  
     
    세수와 금융시장까지 반도체에 매달리면, 위험은 국가 전체로 확산된다. 
    호황기에는 법인세가 쏟아지고 주가가 오르지만, 불황기에는 세수 결손과 자산가격 하락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호황기에 풀린 돈이 신산업 투자나 생산성 향상보다 부동산으로 흘러간다면, 자산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수 있다.   

     
    ■ 정부의 오지랖

    해법은 반도체 산업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 산업과 다른 산업들이 같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소재·부품·장비의 국내 경쟁력을 높이고, AI가 의료·교육·건설·물류·농업·서비스업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기업 스스로 구하게 하는 것이다. 
    정부의 오지랖 은 의도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부가 균형발전 또는 정치적 상징성 을 앞세워 대규모 반도체 생산설비 증설을 약속하고 다니면, 시장에 오신호를 날릴 수 있다.   
     
    반도체는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하지만 극단적인《반도체 쏠림》은 문제다. 
    네덜란드가 가스를 얻고 제조업을 잃었듯, 한국도 반도체에 취해 산업의 다양성과 교역조건의 안정성을 잃을 수 있다

    반도체로 흥한 나라 한국에《반도체 강국》이란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 찬사는 양면적이다. 
    《사이클》이 있어서다. 
    어느 날 그 찬사가네덜란드 병으로 한국이  거덜나 거덜란드가 됐다 는 탄식으로 바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