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은 명확하다" 한마디에 장기금리 급등기준금리·시장금리 격차 1.7%p 안팎 벌어져정부는 98.7조 공급, 한은은 금리 경계령"시장은 정답보다 총재의 언어를 본다"
  • ▲ 신현송 한은 총재 ⓒ한은
    ▲ 신현송 한은 총재 ⓒ한은
    의사는 환자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수술실로 들어가는 환자에게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의사를 좋은 의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환자를 살리는 방식도 아니다. 

    중앙은행 총재도 비슷하다. 위험을 발견하면 경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경고가 시장을 필요 이상으로 흔들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답을 말하는 것과 시장을 관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능력이기 때문이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를 둘러싼 최근 논란도 여기서 시작된다. 지난 5월 27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그는 "물가로 보나 성장으로 보나 환율·부동산으로 보나 갈 길은 명확하다"고 말했다. 중앙은행 총재의 발언치고는 이례적으로 직설적이었다. 시장은 곧바로 긴축 신호로 해석했다. 

    이후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3.0% 안팎에서 3.7%대로 뛰었고, 10년물 금리는 4.2%선까지 치솟았다. 기준금리는 연 2.50%에 머물러 있었지만 시장은 이미 훨씬 높은 금리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준금리와 10년물 금리 차이가 1.7%포인트(p) 가까이 벌어지면서 시장이 향후 추가 긴축과 물가·환율 리스크를 대거 선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정부가 추경과 유동성 공급으로 경기를 떠받치려 해도 기업과 가계가 체감하는 자금조달 비용은 더 빠르게 올라가는 구조다. 채권시장에서는 "25bp 금리 인상보다 총재 발언 충격이 더 컸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틀 뒤 열린 BOK 국제컨퍼런스에서도 신 총재는 물가와 금융안정을 강조하며 비슷한 메시지를 이어갔다. 시장은 다시 긴장했다. 세종시에서는 "정부는 돈을 풀고 있는데 한은은 시장금리를 조이고 있다"는 푸념이 흘러나왔다. 실제 정부는 추경을 편성해 경기를 떠받치고 있고, 금융당국은 자본규제 완화를 통해 은행·보험권에서 최대 98조 7000억원 규모의 추가 자금 공급 여력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역시 국내 주식 비중 확대를 검토하며 증시 수급을 지원하고 있다. 한쪽은 불을 지피고 다른 한쪽은 연기가 난다고 경보를 울리는 형국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 총재의 문제의식 자체는 틀리지 않다는 점이다. 원·달러 환율은 장중 1530원을 돌파하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외환보유액은 최근 4260억달러 수준까지 감소했다. 서울 강남권 집값은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가계대출도 재팽창 조짐을 보인다. 국제유가 역시 중동 리스크에 따라 다시 배럴당 100달러를 넘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앙은행 총재라면 누구라도 우려할 만한 변수들이다.

    그래서 지금 논란의 본질은 신 총재가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뛰어난 경제학자가 총재가 됐다는 데 있다. 신 총재는 국제결제은행(BIS)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통화경제국장을 지낸 세계적 석학이다. 거시건전성 정책 분야에서는 글로벌 중앙은행 총재들이 먼저 이름을 꺼내는 몇 안 되는 한국인 경제학자다. 해외 금융권에서는 "한국이 데려올 수 있는 최고의 카드"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의 말이 시장에 더 크게 들리는 이유 역시 그의 경력과 명성 때문이다.

    하지만 학자와 중앙은행 총재는 다른 직업이다. 학자는 위험을 발견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된다. 반면 중앙은행 총재는 위험을 알리면서도 시장이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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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데일리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대공황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였다. 프린스턴대 교수였고 훗날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국면에서 그는 경제학자의 언어보다 중앙은행 총재의 언어를 택했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시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먼저 고민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는 더욱 상징적이다. 그는 2012년 유로존 위기 당시 "Whatever it takes(무슨 일이 있어도 유로를 지키겠다)"라는 단 한 문장으로 시장을 진정시켰다. 실제 정책보다 그 메시지의 힘이 더 컸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경제학을 몰라서 조심한 것이 아니다. 시장이 숫자보다 언어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가에서도 비슷한 평가가 나온다. 한 경제부처 관계자는 "신 총재가 틀린 말을 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문제는 시장이 총재의 말을 너무 믿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신 총재는 학자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이 강한 편"이라며 "시장과 호흡을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금융권에서는 종종 이주열 전 한은 총재가 거론된다. 이 전 총재 역시 금리 결정 때마다 비판을 받았지만 시장은 대체로 그의 화법을 예측할 수 있었다. 무엇을 말할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를 아는 총재라는 평가도 있었다.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기대를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시장은 경제지표보다 총재 발언을 먼저 해석한다. 금통위 결과보다 기자회견 문장 하나가 더 큰 뉴스가 되고, 기준금리보다 총재의 뉘앙스가 더 큰 가격 변수가 되고 있다.

    물론 한국은행은 정부 눈치를 보는 조직이어서는 안 된다. 독립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다만 독립성과 소통은 다른 문제다. 총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 감각이 아니라 파장을 계산하는 감각이다.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면서도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이다. 경제학자와 통화당국 수장의 차이도 결국 여기에 있다.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은 미래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시장이 미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드는 데 가깝다. 신 총재의 경제학적 역량은 이미 세계적으로 검증됐다. 지금 시장이 궁금한 것은 그의 실력이 아니다. 시장은 이미 그의 분석보다 그의 발언이 움직일 금리와 환율을 먼저 계산하기 시작했다. 총재의 자리는 정답을 말하는 곳이 아니라, 그 정답이 시장에 미칠 파장까지 책임지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