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세계 첫 대규모 법관 선거…"법보다 정치 앞설 우려"마두로가 장악한 베네수엘라 사법부, 독재정권 대물림 현실화헌법 해석까지 바꾼 엘살바도르 사법부, 권력의 도구로 전락진영 아닌 권력자 태도가 민주주의 명운 갈라
  • ▲ 멕시코 할리스코주(州) 과달라하라에서 사법부 직원들이 판사 직선제 등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며 '테미스'(신화 속 율법의 신) 분장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 멕시코 할리스코주(州) 과달라하라에서 사법부 직원들이 판사 직선제 등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며 '테미스'(신화 속 율법의 신) 분장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사법부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불린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반면, 사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독립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헌법 정신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세계 곳곳에서 정권이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정치 성향이 서로 다른 국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멕시코, 베네수엘라, 엘살바도르가 대표적이다. 좌우 이념의 문제를 넘어, 권력을 쥔 이들이 사법부를 자신에게 유리한 구조로 재편하면서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멕시코는 다음 달 1일 대법관을 포함한 연방 판사 약 881명을 국민투표로 선출할 예정이다. 대규모 법관 선거는 지난해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이 주도한 개헌에 따라 도입된 것으로, 국민이 직접 사법부를 구성하겠다는 '사법 개혁'의 일환이다. 명분은 국민 참여와 투명성 확대지만, 현실은 정권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당선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비판이 거세다. 이번 선거에는 약 4만9000명이 지원했고, 이 중 3400여 명이 후보로 등록됐다. 유권자들은 이 많은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를 거의 알지 못한 채 투표에 임해야 한다.

    이 같은 정보의 비대칭성은 정권과 가까운 후보자들에게 절대적인 유리함을 안겨준다. 여당 모레나당의 후원을 받는 후보자들은 자금, 조직, 언론 노출 면에서 독립 성향 후보들을 압도한다. 유권자들은 결국 이름을 들어봤거나 여당이 추천한 인물에 표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 사실상 정권이 선호하는 후보들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임명'되는 것과 다름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욱이 이번에 선출된 판사들은 최대 12년의 임기를 보장받고, 향후 재선도 가능해지는 구조여서, 법과 원칙보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판결할 유인이 생긴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현지 언론 엘파이스는 이미 정치권이 특정 후보의 등록을 압박한 정황이 있다고 보도했다.
  • ▲ 25일(현지시간) 총선·지선 압승을 주장하며 주먹 쥐어 보이는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연합뉴스.
    ▲ 25일(현지시간) 총선·지선 압승을 주장하며 주먹 쥐어 보이는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연합뉴스.
    베네수엘라는 이미 사법 독립성이 사실상 붕괴한 상태다. 지난 25일 치러진 총선 및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12.5%에 그친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추산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투표소에 나오지 않았다. 지난해 대선에서 야권 후보가 앞섰다는 여론조사와 출구조사에도 불구하고, 마두로 대통령이 51%의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선관위가 발표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에게 사법부는 진실을 밝혀줄 기관이 아니라 정권의 편을 드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법 독재는 차베스 전 대통령 집권기부터 본격화됐다. 차베스는 2004년 대법관 수를 기존 20명에서 32명으로 늘리고, 그 자리를 모두 친정부 성향 인사로 채웠다. 이후 마두로 정권은 야권 탄압, 선거 부정, 언론 통제 등 헌법 위반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사법부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 야권 인사들을 검거하거나 선거 무효 소송을 기각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축인 사법부가 정권 유지의 방패막이가 된 것이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우파 정권 하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강력한 갱단 소탕과 부패 척결로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부켈레 대통령은 헌법상 재선 금지 조항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대선에 출마해 85%에 가까운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대법원의 유권 해석이었다. "6개월 이상 재임한 사람은 10년 내 재출마할 수 없다"는 조항을 "임기 종료 6개월 전 휴직하면 출마 가능하다"는 해석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 역시 2021년 총선에서 여권이 압승한 직후, 부켈레가 국회를 장악하고 대법관과 검찰총장을 교체한 결과였다. 당시 야권은 이를 두고 "사법부가 정부의 거수기가 됐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지난 총선에서도 개표가 일주일 넘게 지연되면서 선거 관리의 공정성 논란이 일었지만, 사법부는 이를 무시했다. 정권을 견제할 수 있는 법적 시스템이 무력화된 채, 권력 중심의 일방통행이 고착화된 모습이다.

    이처럼 좌우를 막론하고, 정권이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는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멕시코는 제도 개혁이라는 형식을 빌어 사법을 정치화하고 있고, 베네수엘라는 사법을 정권 연장의 도구로 전락시켰으며, 엘살바도르는 헌법 해석까지 권력의 입맛에 맞게 바꾸며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하고 있다.

    결국 사법 독립성 침해는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자의 태도 문제다. 그리고 이 단순한 진실에 눈을 감고, 국민이 무비판적으로 표를 던져 권력을 쥐어주는 순간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는 서서히 침식되어 간다. 

    지금 세계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권의 '사법 장악'과 '민주주의 자멸'은 그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