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오후 7시께 서울대학교병원서 노환으로 세상 떠나이승만기념사업회 "고인은 한결같이 아버님 선양에 진력"이인수 박사, 1961년 이승만 양자 입적… 부친 임종 지켜
  •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92) 박사가 휠체어에 탄 채로 지난 9월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 내 유영봉안소에서 참배한 뒤 4·19혁명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향해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92) 박사가 휠체어에 탄 채로 지난 9월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 내 유영봉안소에서 참배한 뒤 4·19혁명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향해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서성진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아드님이신 이인수 박사가 1일 오후 6시53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영면하셨다"며 "고인은 63년간 한결같이 '아버님 선양'에 진력하셨다"고 소개했다.

    이 박사는 이 전 대통령이 하와이에 체류하던 시절인 1961년 양자로 입적됐다. 1961년 11월 전주 이씨(李氏) 문중의 결정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86세로 고령인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영어로 대화할 줄 알아야 하고, 미혼이며 가정교육이 바른 집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적합한 사람이 이 박사였다. 

    이 박사는 양녕대군의 17대손으로 16대손인 이 전 대통령과 계대(系代)가 맞기도 했다.

    이 박사는 당시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지만, 독일유학을 앞두고 운명적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전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양자 인수가 오기를 학수고대했고, 처음 만났을 때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좋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박사는 양자로 입적된 후 세 차례 하와이를 찾았다. 1961년 12월13일~1962년 3월17일, 1964년 1월28일~4월2일, 그리고 1965년 7월4일 마우라니 요양병원으로 가서 7월19일 이 전 대통령의 임종을 지켰다.

    이 박사는 1991~93년 명지대 법정대학장을 지냈으며, 1996년부터 이승만대통령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며 부친의 명예회복에 힘썼다.

    이 박사는 2011년 이 전 대통령의 '그늘'인 4·19혁명 희생자들과 화해를 위해 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고 사과문을 발표하려 했다. 그러나 4·19 관련 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4·19혁명 63년 만인 지난 9월1일 이 전 대통령 유족으로는 처음으로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희생자의 넋을 기렸다.

    당시 휠체어를 탄 채 국립4·19민주묘지 내 유영봉안소를 찾은 이 박사는 2~3명의 부축을 받아가며 직접 4·19 민주영령들을 위해 하얀 장갑을 끼고 향을 피웠다. 이 박사는 두 발로 서기 어려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분향한 후 다시 휠체어에 앉아 영정 앞에서 두 차례 머리를 숙여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 박사는 이어 준비해온 사과문을 낭독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로서 63년 만에 민주영령들에게 참배하고 명복을 빌었다"며 "이 자리를 통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들께 깊은 위로와 함께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했다.

    "제 참배와 사과에 대해 항상 국민을 사랑하셨던 아버님께서도 '참 잘하였노라' 기뻐하실 것"이라고 밝힌 이 박사는 "이번 참배가 국민 모두의 '통합'과 '화해'를 도모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기대했다.

    이 박사의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발인은 오는 4일 토요일 오전 10시 예정이다. 이 박사는 부인 조혜자 여사와, 슬하에 두 아들 병구·병조 씨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