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훈격국민공감위원회 오는 7일 첫 회의… 역사학·법조·언론계 등 17명6개월간 활동하며 독립운동 공적 재평가… 각계 의견 수렴 및 논의, 방향성 제시
  •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상옥, 박상진, 이상룡, 헐버트, 나철, 최재형, 이회영. ⓒ국가보훈처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상옥, 박상진, 이상룡, 헐버트, 나철, 최재형, 이회영. ⓒ국가보훈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들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따라 정부가 이들의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한 움직임에 나선다.

    국가보훈처는 역사학계·법조계·언론계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포함된 '독립운동훈격국민공감위원회'를 구성하고, 오는 7일 첫 회의를 연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약 6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공적 재평가에 따른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위원장은 유영렬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이 맡으며, 김명섭 연세대 교수, 김종민 변호사, 최완근 전 국가보훈처 차장, 김능진 전 독립기념관장, 언론인 등 17명으로 구성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은 독립 이후인 1949년 최초로 실시됐다. 본격적으로 포상이 이뤄진 것은 10여 년 뒤인 1962년부터다. 김구(대한민국장, 1962)·안중근(대한민국장, 1962)·윤봉길(대한민국장, 1962)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훈장을 받았다. 상훈법 제정은 1963년 12월14일이다. 

    하지만 당시 독립유공 공적에 관한 근거자료가 부족하고, 구전을 통해 전달되면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등 제한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부 독립유공자의 경우 공적에 비해 낮은 훈격으로 포상됐다는 공정성 논란이 제기돼온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김상옥(대통령장, 1962)·박상진(독립장, 1963)·이상룡(독립장, 1962)·이회영(독립장, 1962)·최재형(독립장, 1962)·나철(독립장, 1962)·헐버트(독립장, 1950) 등이 있다.

    이들 후손과 기념회, 지방자치단체 등은 이들 독립운동가의 공훈에 비해 훈장이 공정하게 포상되지 않았다며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러나 '동일한 공적에 대해 훈장 또는 포장을 중복으로 수여할 수 없다'는 상훈법 4조에 따라 공적 재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보훈처는 발목을 잡고 있는 상훈법 4조가 '동일한 공적'을 대상으로만 제한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새로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저평가된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재평가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이뤄진 정부 주도의 독립운동가 발굴로 인해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고 보훈처는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 기회에 독립운동 훈격 전반을 대상으로 한 점검도 진행할 방침이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독립유공자 중 여운형 선생 등은 당시 공적을 기준으로 심사・포상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공적에 대한 재평가 없이 '독립운동 공적이 아닌 사회적 영향력' 등을 평가에 반영해 최초 포상(대통령장, 2005) 이후 불과 3년 만에 기존 포상보다 높은 훈격으로 추가 포상해 선심성 및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처장은 "과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사례를 보면 6・25전쟁 당시 공적이 있는 미군 사령관 등에게 무공훈장과 별개로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외국정부 대표 등에게는 수교훈장이 적절함에도 건국훈장을 수여하는 등 훈장 수여 적정성에 논란의 여지를 남겨둔 것도 아쉬운 점으로 여겨진다"고 언급했다.

    박 처장은 "과거 포상된 분들의 경우 당시 확인된 자료만으로 훈격이 부여됨에 따라 사료가 추가 발굴되는 시점에서 억울한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포상 이후 추가로 확인된 공적까지 종합적으로 다시 평가해 공적에 걸맞은 훈격을 되찾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저평가된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은 다음과 같다. 

    김상옥 의사(대통령장, 1962)는 1920년 미국 의원단의 방한을 계기로 암살단을 조직해 조선총독부 고관 처단을 시도하다 도피 후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1922년 조선 총독 처단과 총독부 폭파 등을 재차 시도하다 체포를 피해 남산을 넘나들며 홀로 1000명의 경찰 체포대에 맞섰고, 격렬히 저항하다 순국했다.

    박상진 의사(독립장, 1963)는 1915년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고, 같은 해 당시 국내 최대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를 조직, 총사령이 돼 1917년 칠곡 부호 장승원 처단과 1918년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 등을 지시한 주인공이다. 중국 만주로 세력권을 확대해 활동하다 체포 후 사형을 언도받고 순국했다.

    이상룡 선생(독립장, 1962)은 1896년 가야산에서 의병 봉기를 시도하고,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해 회장에 추대됐으며,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에 따라 1911년 대가족을 이끌고 중국 만주로 이주해 1911년 경학사 사장, 1919년 군정부 총재 및 서로군정서 독판을 지냈다. 

    이회영 선생(독립장, 1962)은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당시 국내 최대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고, 경술국치 직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1912년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24년 베이징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데 이어, 1932년 만주사변 이후 주만 일본군사령관 처단을 목적으로 활동하던 중 체포돼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최재형 선생(독립장, 1962)은 1906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창설하고 1909년 한인신문 '대동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 처단 장소로 하얼빈을 추천하고 사후 대책을 준비했다. 1911년 권업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고, 1910년대 막대한 재산을 들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의병 세력을 지원하다 일본군에 체포된 후 피살 순국했다.

    나철 선생(독립장, 1962)은 을사늑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국권회복을 위한 민간외교를 펼치고, 1907년 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하다 체포돼 유형(유배) 10년을 받았다. 다행히 사면 받았으나, 이듬해인 1908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국권회복 방안을 모색하는 등 굴하지 않았다. 1909년 귀국해서는 단군교(대종교)를 창립하고 초대 교주가 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미국인인 헐버트 박사(독립장, 1950)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4의 특사'로 활약하고, 1912년 '뉴욕헤럴드'에 105인 사건이 날조됐음을 폭로했다. 이후 1919년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외국인단체인 한국친우회에 합류해 미국 주요 도시를 돌며 순회강연을 벌이고, 스펜서와 함께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다룬 문건을 제출했으며, 1942년에는 워싱턴D.C.에서 한인자유대회에 참석,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