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43호 자녀, 북한내에서 인권유린 및 차별 심각 남편, 장인어른이 국군포로라고 아이들 버리고 집 나가
  • ▲ 국군포로 43호의 자녀 손명화씨ⓒ본인 제공
    ▲ 국군포로 43호의 자녀 손명화씨ⓒ본인 제공
    10월 1일은 국군의 날이다. 이날 기념행사에서  F-16·F-35 등 전투기가 공중분열을 보이고, 블랙이글스가 축하 비행을 했다. 위용을 뽐내는 화려한 무기들 속에, 잊지 말아야 하는 슬픔이 있다. 

    바로 6.25전쟁 중 끌려가 북한에 억류된 군국 포로들이다. 유엔은 10만 명, 국방부는 총 8만 3000여 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남아있다고 추산했다. 이들은 6.25 전쟁 시 포로로 잡혀왔기 때문에 북한 내에서 적대 계층으로 분류돼 심각한 차별과 인권유린을 당했다. 

    국군 포로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 포로들은 대부분은 북한 광산에 노동 인력으로 투입돼 혹사당했다고 한다. 또, 북한은 국군 포로들에게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만약 사상 전향하면, 대학에 보내주는 등 여러 혜택을 주겠다고 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되레 남한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한 이들이 있다. 바로 국군 포로 43호다. 이들은 북한 내에서 낙인 찍혀 사회에서 평생 매장당했다고 한다. 이들 자녀도 심각한 차별과 비난을 당했다. 

    손명화 씨는 국군 포로 43호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혀, 고문당하고, 강제노역소에 보내졌다. 아울러 그의 가정은 파탄 났다. 이에 <뉴데일리>는 손명화 씨를 만나 북한에서 국군포로들의 삶은 어땠는지 자세한 내막을 들어봤다.  

    국군포로 43호의 자녀라는 이유로 고문과 강제노역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 포로 숫자는?

    "유엔에서는 10만 명, 국방부는 8만3000명, 국군포로 가족협회에서는 7만 6300명으로 추산했다."

    -국군 포로 43호가 뭔가?

    "국군 포로한테 공민증(신분증)을 준 서류가 43호다. 그래서 국군 포로는 43호라고 불렸다."

    -북한에서 국군 포로의 삶은 어땠나?

    "국군 포로들은 북한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분리됐다. 국군 포로 대부분은 아오지탄광, 광산에 보내졌다. 그들은 노동 인력으로, 북한에서 평생 노예로 부려 먹었다."

    -고문을 어떻게 당했나?

    "물 한 두 바가지 가지고 와서 부었다. 수갑을 채운 채, 줄자로 손을 때렸다. 구둣발로 찼다. 열쇠고리 흔들다가 머리를 쳤다. 이런 고문을 당했다."

    -강제노역소에서 삶은 어땠나? 

    "낮에는 일했다. 7시에 저녁 식사를 했다. 8~10시는 대외 점검 그리고 김일성과 사회주의에 관한 교육을 받고, 노래 연습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북한 10대 원칙을 공부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암송,암기해야 했다. 이런 것을 8시부터 10시까지 하고, 취침한다."
  • ▲ 국군포로 43호 자녀 손명화 씨ⓒ본인 제공
    ▲ 국군포로 43호 자녀 손명화 씨ⓒ본인 제공
    가정파탄 후 탈북 …남한에서도 고된 삶

    -국군 포로의 딸이라는 낙인찍인 후 가정이 파탄 났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남편이 (장인어른이) 국군 포로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작은아들 3살, 큰아들이 5살이었다. 장인이 국군 포로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남편이 애 두 명을 버리고 다른 여자랑 밖에 나가서 살았다. 

    애들이 커가고 10년이 되갈때쯤, 다시 집에 왔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다른 여자와 살면 배고픔의 서러움이 있으니깐 (남편이) 다시 살자고 제안했다. 근데 내가 22호 관리소(강제노역소)에 갔다. 남편이 다시 들어와 3년 살았다. 22호 살다가 다시 돌아오니 남편이 없었다.

    아이들 보고 아버지 어디 갔냐고 물어보았다. 고난의 행군이지, 나는 22호 관리소 갔지, 이러니 남편이 술에 독약을 타서 애들 보는 앞에서 죽었다. 아이들이 장례식을 치렀다. 22호 갔다가 10달 후에 돌아오니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작은애 15살, 큰애가 17살이었다. 가정이 파탄 났다. 안 되겠다 싶어서 탈북했다."

    -아버지 유해를 북에서 송환해온 뒤 오빠, 동생, 조카가 정치범수용소 갔다. 이들 소식을 알고 있나?

    "세 명 다 소식 모른다. 오빠, 71년생 동생, 조카가 정치범수용소에 갔다. 2년 후 오빠가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었다는 통지가 왔다고 한다. 이후 모른다. 동생, 조카 둘 다 살아있는지 모른다."

    -1인 시위한 이유는?

    "아버지 유해를 모시고 왔는데 아버지를 국군 포로로 인정 안 했다. 국군 포로에 대한 대우법이 있다. 살아 돌아온 국군 포로는 (이 법률에 의한) 법적 근거가 있다. 반면 유해로 돌아온 국군 포로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국군포로 인정 안 해줬다. 

    결국 아버지랑 나랑 DNA 검사를 했음에도, 아버지 병적증명서에는 1951년 전사로 처리했다. 나는 1962년생이니깐 아버지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전역 날짜를 고쳐서, 자식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처리 안 해줬다.

    국군포로 유해 법률을 개정해줬다. 유해가 오면 살아온 국군 포로처럼 대우해주고, 유해를 송환해온 중국인 브로커 비용 1500만 원을 주겠다는 법 조항을 대통령 특별법으로 개정해줬다. 1인시위 8개월 후 법률이 개정됨으로써 아버지를 안장 했다."

    -국군 포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대한민국이 국군 포로에게 관심이 없다. 미국은 유해 한 구라도 돈 주고 사 오는데, 대한민국은 몇만 명의 국군 포로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군 포로 자녀들이 탈북 후 남한에서의 삶은 어떤가?

    "사회에서 매장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도 아버지가 국군 포로라는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다. 북한에서 감시 속에서 자랐고, 주변에 누구하고 말 못하고, 침묵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도 표현력이 부족하다. 억울하다, 어디 가서 배우겠다, 이렇게 당차게 살 능력이 부족하다. 한국 와서도 사회적응이 힘들다. 우울증, 불면증 겪는 이들이 많다."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왜 나를 낳았냐고 원망했다. 아버지를 구박했던 자식으로써, 그런 (철없는) 생활을 많이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아버지한테 미안하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자식으로써 아버지를 구박한 것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아버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젊은 나이에 총을 잡고 전쟁터 나간 것 보면, 나도 연좌제로 살았지만, 아버지의 삶은 돌이켜보면 (아버지 삶에는) 행복조차 없었다. 마음이 짠하다. 아버지한테 미안하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이라도 70년 분단으로 잊혀진, 버려진 국군 포로들을 보듬어줬으면 한다. 국군 포로 자녀들을 삶을 조금이나마 행복해질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마련해줬으면 좋겠다.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으면 좋겠다. 국군 포로 문제는 국가적 책무로써, 국가가 과감하게 국군 포로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