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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28일 니가타 현에서 1959년 당시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에 관여했던 일본 공산당원 출신 코지마(小島)씨가 일본을 방문한 이화여대 연수생들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7월 29일자 요미우리신문 보도. ⓒ 뉴데일리 DB
재일 조선인 북송사업에 관여했던 옛 일본공산당원이 한국 대학생들에게 "북한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화여대 북한대학원생과 학부에 재학 중인 탈북 학생 20명으로 구성된 일본 연수팀이 공산당원 출신 코지마 하루노리(小島晴則, 87)씨를 만난 건 지난 28일 니가타현의 한 강연장에서였다. 연수팀은 지난달 27일부터 5박 6일 일정으로 현지인들을 만나며, 재일 조선인 북송문제와 일본인 납북자 문제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분단과 치유'가 연수의 큰 테마였다.
1949년 18세에 일본 공산당에 입당한 코지마씨는 당시 니가타현 재일조선인귀국협력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북한과의 연계 하에 재일본 조선인 북송사업을 추진했다고 한다.
코지마씨는 강연에서 "당시에는 북한을 좋은 나라로 알고 있었고 일본인들도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 때는 자신이 인도주의적인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고백까지 했다. 그는 "북송을 앞둔 조선인들도 북한에 대한 기대로 한컷 들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 정부가 인도주의적 원칙으로 북한과 함께 조선인 북송사업을 진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일 두 나라의 음흉한 합작 '북송'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도 재일본 조선인들을 하루빨리 해외로 추방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체제선전이라는 북한의 정치적 목적과 맞아떨어져 진행된 일이란 것이다. '북일 양국의 음흉한 합작품'이었다고 코지마 씨는 강조했다.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코지마 씨는 1974년에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 때 코지마 씨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코지마 씨는 충격적인 광경을 봐야 했다. 자신의 손을 거쳐 북송된 재일본 조선인들이 북한에서 심각한 탄압과 감시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굴곡진 과거와 과오에 대해 고백하던 코지마 씨가 참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국에서 찾아온 여학생들에게 말했다.
"제 뼈저린 과거를 보고 북한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저 때문에 북송된 수많은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에게 큰 죄를 지었습니다."
코지마 씨의 증언을 들은 손유민 이대 북한대학원생은 "북한정권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강요당한 조선인들의 사연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남한에 북한을 찬양하고 북한정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심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황당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80년대 중반까지 재일 조선인 10만명 북송길에
1959년 12월 14일 최초의 조선인 북송선이 일본의 니가타현 니가타항을 출발했다. 그렇게 1984년까지 북한으로 송환된 조선인은 10만명에 이르며 북송된 조선인들과 가족이었던 6,839명의 일본인들도 함께 북송길에 올랐다. 재일본 조선인 북송사업은 북한과 일본 적십자사, 그리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협력해 진행한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였다.
일본 정부와 조총련의 꾀임에 넘어가 북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북송을 자처한 재일 조선인들은 북한 정착 후 '째포('재일동포'를 비하해 부르는 표현)'로 불리며 북한 사람들의 무시와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북한 사회의 차별 뿐 아니라 취업과 학업, 입당(조선노동당 입당), 승진 등에서 '째포'라는 신분으로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특히 북송된 재일 조선인들의 고향이 대부분 북한지역이 아닌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 남한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거나 숙청되기도 했고 그들의 자식들까지 불행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북한은 여전히 "김일성과 김정일이 재일본 조선인들을 잊지 않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다"며 재일조선인 북송의 진상을 왜곡하고 있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