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이만섭 국회의장의 자서전, 제목이 묵직하다. <나의 정치 인생 반세기>
부제(副題)는 감상적이다. “이승만에서 노무현까지, 파란만장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50년”
그 시절의 인물로서는 드물게 키가 큰 만큼이나 긴 시간을
이 나라 정치의 한복판에서 보냈다.
격동의 세월 속에 빛나는 명장면을 짚어본다.
“털보” 응원단장으로 유명했던 연세대학교 시절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저항하다가 정치 깡패들에게 두드려맞았던 기자
5. 16 이후 혁명정부에 의해 감방에서 보낸 3개월
자신을 감옥에 보낸 정권을 열혈 지지하고 국회의원으로 변신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와 수난
5공화국의 국민당과 이인제의 국민신당, 꼬마 야당 당수
헌정 사상 최초로 당적(黨籍)을 갖지 않은 국회의장
날치기를 거부한 8선의 소신과 관록
1979년의 <조선일보>는 “옳소 국회에 여(與)의원의 비옳소 파문”으로 소개했다.
대통령이 입을 열 때마다 “옳소”를 반복하던 자동응답기식 여당에서
용기있게 정권을 비판했던 “체제 내 반골”의 초상이었다.
그리고 1994년 같은 신문에서는 고인의 국회의장 재임 기간을
“야호(野好) 여불호(與不好)”로 정리했다.
여당 몫으로 의장이 되었지만 야당에게 더 큰 박수를 받았던 특이한 행적이었다.
“짧고 굵게”와 “가늘게 길게”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굵으면서 길게”, “소신을 지키면서도 굵다가 가늘다가”, “가늘다가 짧게”의
다양한 변수가 가능함을 일깨워준 생애였다.
필자의 소견으로, 최고의 명장면은 1963년 대통령 선거 유세이다.
군사혁명에 반대했고, 민간에게 정부를 이양해야한다는 윤보선의 발언을 보도했다가
감옥에 갔던 반골기자는 돌연 박정희의 찬조 연사로 등장했다.
-
▲ 모내기 현장을 찾은 박정희, 농민들과 막걸리를 즐기기도 했다. 박정희의 서민들을 향한 애정에 비판자였던 이만섭은 깊이 감동받았다.
그날의 변신을 고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서민의 사정을 잘 모르는 귀족 출신인 윤(보선) 전 대통령보다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과 서민의 고통을 잘 아는 박정희 후보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명문가 출신에 세도 좋은 양반의 기풍이 풍겨났던 윤보선과
죽는 날까지 해진 허리띠를 매고 평민들이 애용하는 시계를 손목에 찼던 박정희 사이에서
그가 속한 신문사는 열렬한 윤보선편이었는데
반골기자는 “기자”의 타이틀을 던지며 서민의 편에 섰다.
대구의 수성천에 수십만이 운집한 그날은 구두닦이들에겐 대목이었다.
그들을 가리키며 이만섭은 외쳤다.
“바로 여기 앞에 앉아있는 구두닦이 소년들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그런 세상이 돼야 합니다.
이제 서민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귀족들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이만섭은 정확했다.
박정희는 공(功)과 과(過)를 넘나들면서도 서민, 농민,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고 꾸짖었다.
국가와 공기업이 주도하는 시험에서 학력 차별을 없애기도 했다.
필자는 전국을 돌면서 강연하는 현장에서
고졸 학력으로 방송대상으로 받은 PD,
가난한 집안이어서 인문계로 못가고 공고를 나왔다가 억대연봉이 된 노동자,
굶어죽은 동생을 둔 거지에서 출발한 기업가,
개천 출신의 숱한 용들을 만났다.
최대의 수혜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이다.
대학을 졸업해야만 응시할 수 있었던 사법고시에서 학력 제한을 철폐한 이가 박정희,
그래서 상고 출신으로 고시에 합격해서
판사도 하고 변호사도 할 수 있었던 이가 노무현이다.
박정희를 스승으로 모셨다가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 국회의장이 되었고
야당같은 여당, 여당같은 야당으로 8선을 기록했으며
청(淸)과 탁(濁)을 함께 들이마시며 시대를 버텨낸 거인이 갔다.
고인의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아버지 계신 곳에서 영원히 안식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