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과 그를 이은 이오시프 스탈린은 세계공산혁명을 주도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이라는 공산화 국가를 건설한 이들의 목표는 세계공산화였다. 세계공산화로 가는 길에 한반도도 포함됐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라고 주장해왔던 소련의 주장은 1945년 9월 소련의 스탈린이 북한에 보낸 비밀지령이 공개되면서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46년 3월20일부터 1947년 10월21일까지 개최된 미국과 소련의 회의(미소공동위원회)가 있기 전 이미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의 공산화 전략을 짰다.
1945년 8월6일 소련은 평양에 보낼 '카레이스키' 500명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카레이스키'는 절대 권력 스탈린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소련군정을 대신해 평양의 한인들과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카레이스키'는 비록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의 먼 타국에서 세대를 이어 살았지만 한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살았다. 스탈린의 눈에 평양을 지배하는 데 '카레이스키'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스탈린은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까지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모집한 '카레이스키' 500명을 평양에 보냈다. 스탈린은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할 '글쟁이' 엘리트를 가장 먼저 보냈다. 이들 엘리트들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은 물론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이들 '글쟁이' 엘리트가 평양에 신문과 방송을 만들었고 매체를 통해 대중 선동을 했다. 그 후 김일성을 비롯한 군인들, 국가를 건설할 기술관료들이 차차 평양에 자리를 잡았다. 소련군의 신분으로 들어온 500 여명의 '카레이스키'는 소련군정의 이야기를 번역해 알리고 평양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데 역할을 했다.
1945년 10월14일, 33세 김일성이 평양에 들어왔다. 스탈린이 보낸 '카레이스키' 엘리트가 이미 김일성에 대한 영웅화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김일성은 평양에 오기 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1박2일 면접을 받고 간택을 받았다. 방송과 신문을 만든 '카레이스키' 엘리트들은 김일성이 평양에 온 이후에는 김일성에 대한 기사를 집중 보도했다.
1946년 2월16일 34세의 김일성은 사실상의 북한 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소련군정은 해방 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反공산주의 사상가 이승만 박사가 서울에 입국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워싱턴에서 전해 듣고 서둘러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이는 소련군정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강력한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서두르지 않으면 이승만의 영향력으로 한반도 공산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강력한 반공주의 노선을 선택했다.
1950년대 6.25 전쟁을 일으킨 소련은 내부적으로 자신들이 내세운 김일성을 위해 그의 정치적 적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공산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던 '카레이스키' 500인 중 리더였던 허가이는 1951년 11월 의문의 죽을 당했다. 북한 정부는 허가이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발표했지만 정황상 타살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박헌영도 1953년 감금됐고 1955년 숙청됐다. 스탈린은 자신이 세운 김일성의 입지를 뒤흔드는 정치적 적인 허가이와 박헌영을 사라지게 만들면서 김일성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 또 스탈린은 북한을 만든 '카레이스키'도 소련으로 복귀를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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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후 전 중앙일보 편집국 부국장ⓒ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김국후 부국장은 포럼의 마지막에 자신의 연구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남겼다. "한민족이 연해주로 이주하고 중앙아시아에 자리를 잡은 역사가 벌써 150년 이상 지났다. 그리고 북한을 만든 한민족 '카레이스키'에 대한 이야기도 세월에 묻혔다. 역사의 뒤안길에 존재하는 비사(秘史)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의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 꼭 필요한 조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