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엎자'는 쪽보다 빨리 뛰어야
이제 무엇을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세월호 참사는 너무나 엄청난 문제들을
너무나 한꺼번에 터뜨려 놓았다.
우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능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 불신을 어찌할 것인가?
이 불신은 “도무지 시스템이 없다” “도무지 위급 상황에
훈련이 안 돼있다”는 개탄을 자아냈다.
선진국 다 됐다, 어쩌고 하면서 으쓱댔지만 ‘까고 보니 후진국’이더라 하는 낭패감인 것이다.
이 낭패감은 관료 마피아의 복지부동, 대충대충, 건성건성, 무(無)개념, 끼리끼리 봐주고 해먹는 관행에 대한 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사현장에서 가족들의 박수를 받을 만큼 헌신적으로 일한 공무원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초동단계의 골든 타임을 허비한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선 정홍원 국무총리도 사의(辭意)를 표하면서 시인한 바 있다. 이래서 관료개혁, 시스템 쇄신, 국가개조 같은, 거창한 리모델링
제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그렇게 쉽사리 되는 일일까?
무슨 큰 사태가 터졌을 때마다 ‘새롭게’ ‘새로운’ 어쩌고 하며
개혁을 엄숙하게(정말?) 다짐했지만, 결국은 모두 용두사미로 끝나버리곤 했다.
역대 그 어느 정권의 시스템 개혁 운운도 ‘불가능’의 벽에 부딪혔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만도 없다.
관료들의 태세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가 제구실을 못할 판이다.
뭔가 크게 뜯어고치기는 해야 한다.
이 나라를 형식주의에 빠진 관료 마피아의 손에 마냥 방치할 수는 없을 지경이 됐다.
이 뿐 아니다.
이번 참사의 정치적 후유증이 총체적 국가위기로 번지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도 큰 문제다.
야권(野圈) 내 강경파와 운동권은 이번 참사를 “박근혜 때문이야”로 몰고 갈 것이다.
문제는 이 선동이 ‘단골손님’의 범위를 넘어 일반국민에게 얼마나 더 먹힐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까진 먹히지 않을 것인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지금의 민심은 물론 광우병 때와는 다르다.
문제는 그런 향후의 정세를 가름할 미디어들이 과연 정도(正道)를 걸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번 참사를 보도하는 종편 TV들의 자세를 보면 ‘절제’보다는 ‘휩쓸림’이라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미디어들이 재난보도의 수칙(守則)을 크게 벗어났다는 뜻이다.
재난방송은 속보경쟁, 시청율 경쟁, 프로그램 경쟁, 중계방송하곤 달라야 하는 데 말이다.
오죽했으면 생존자 가족대표가 호소문을 발표했을 때
“언론은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속보경쟁하고 있습니까?”라고 비난했을까?
그런 종편보다는 MBC가 훨씬 차분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방송의 이런 ‘난리치기’가 “이 판에 엎어버리자“는 일부의 선동에 기름을 부을 것인가,
아니면 기름을 부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인가?
다시 말해, 한국인들은 광우병 사태에서 배운 것이 있는가, 없는가?
국민 모두는 이 질문에 곧 직면할 것이다.
또 하나 제기된 문제, 아니, 당연히 제기돼야 할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사람 쓰기 방식이다.
그는 부친이 비명에 서거한 직후 주변의 ‘충신’들이 어떻게 배신하는지를 두 눈으로 봐야만 했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은 불신하게 되었고, 사람을 쓸 때도 "자기 혼자서 관찰해보니까 괜찮더라" 한 사람들, 특히 관료출신들을 기용했다.
그런데 결과는? 세월호 침몰 시각에 그가 믿었던 관료들의 무책(無策)과 허둥댐이었다.
박근혜 식 ‘방에서 나 홀로’ 인사(人事)의 패착(敗着)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남의 말도 좀 들어보면서 사람도 쓰고,
중지(衆志)도 좀 참작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전환할 의향은 없는지?
빨리 움직여야 한다.
“뒤집어엎자“는 쪽의 선동보다 빨리 뛰어야지, 그보다 뒤처지면 왕창 가는 수가 있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