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2013년 한-러 공동선언의 맹점
한반도는 지금 조용히 어떤 하나의 뚜렷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김미영(前한동대 교수)
외교에도 파퓰리즘(대중인기주의)이 있다. 복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외교 파퓰리즘은 '싫어하는 나라'와 '위험한 나라'를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기 목의 비수가 될 수 있다.
한반도는 지금 조용히 어떤 하나의 뚜렷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은 휴전체제의 '종말'이라고 불릴 수도 냉전의 '종말'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때이르게 '평화협정체제'를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꼭 틀린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꿈 꿀 자유는 언제든지 있다.
다만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허들은 여전히 매우 높다.
눈을 가리고 있으면 감쪽같이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오히려 다같이 눈을 뜨고 똑바로 현실을 직시할 때 이 높은 허들을 넘어서는
집중력이 생길 것으로 본다.
2013년 한-러 공동성명은 일정을 줄이고, 약속시간을 준수하지 않은 푸틴의 '괴짜스러움' 때문인지 싱거운 느낌마저 들도록 슬며시 나왔다.
그런데 이 공동성명에는 문제적인 대목이 여럿 보인다.
2001년 한러 공동성명이 'ABM 지지'로 인해 미국에 충격을 주었다면
2013년 공동성명은 일본에 대한 메시지가 매우 강하고 뚜렷하다.
공동성명 33번 항목을 잠시 보자.
[33. 양측은 최근 역사퇴행적인 언동으로 조성된 장애로 인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의 강력한 협력 잠재력이 완전히 실현되고 있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공동의 우려를 표하였다. 양국 정상은 신뢰 강화와 긴장 완화를 통해 동북아시아 평화와 안정을 공고히 해나가야 한다는데 공감하였다.
이와 관련, 양측은 평화와 안보를 공고히 하기 위한 역내 호혜적이고 다층적인 협력 구축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러시아측의 건설적 기여와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환영하고, 협력을 활성화해 나가기로 하였다.]
필자가 보기에 일본에 말조심하라는 얘기다.
이번 공동선언에서 우리 정부는 러시아에 북핵문제에 관련하여
의미 있는 쐐기를 박아두려고 애를 썼을 것으로 보인다.
[31. 양측은 국제사회의 요구와 유엔 안보리 관련 결의에 반하는 평양의 독자적인 핵·미사일 능력 구축 노선을 용인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핵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양측은 북한이 관련 유엔 안보리 결의 및 2005년 9월 19일자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대한민국, 러시아연방, 미합중국의 공동성명을 포함한 비핵화 분야에서의 국제적 의무와 약속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양측은 2005년 9월 19일자 공동성명의 목표에 따라 6자회담 참가국들과 공동으로 회담 재개의 여건 조성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하였다.]
공동성명은 전반적으로 경제적으로나 안보적으로나 우리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눈에 띄는 대목을 찾기는 어렵다. 비자면제, 투자협력 등 크게는 모르겠으나 러시아에서 바라는 것은 그런대로 챙겨간 느낌이다. 나진-하산 철도 운영 및 나진지역 항만 개발사업에 포스코, 현대상선, 코레일이 지분 및 운영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거나, 한국 수출입은행과 한국투자공사등 우리의 경제협력기금을 활용, 이를 지원하고 전력망 연계 등도 검토하게 되었다는 등도 사기업의 채산성보다 우리 세금을 넣어야 할 시혜성이 더 큰 합의로 보인다.
긴 얘기를 줄이기로 하자.
지금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에게 말조심을 요청할 시점은 아닌 듯하다.
역사와 과거 문제뿐 아니라 현재문제에 있어서도 러시아는 위험하다.
6.25전쟁뿐 아니라 정전체제조차 청산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에 책임있는 러시아가 일본보다
동북아평화를 위해 더 좋은 파트너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북핵에 관련된 공동성명의 합의는 한 마디로 미약하다.
NPT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일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NPT 조약의 정의상(by definition) 그렇다. 왜 이런 문구가 필요한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우려를 갖고 있는 책임있는 당국자는 공부 좀 해야 한다.
푸틴은 한국으로 오기 전에 묘한 사전 인터뷰를 했다.
이 인터뷰에서 표명한 '평화적 방법일 때는 남북통일을 지지하겠다'는 말의 뉘앙스가
미국과 일본, 한국을 향해 "북한 핵은 나도 싫어. 그래도 살살해. 내 허락없이 못 건드려."에 가까운 메시지로 들린다.
마음같아선 박대통령이 몰래 뾰족구두로 푸틴의 발등 한 번 꼭 눌려주었으면 한다.
경향신문에 기고한 이부영 전 의원은 "러시아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유일한 외국이었고 러시아가 1년 이상 자신의 외교공관에서 고종황제를 보호했던 사실도 다시 기억해 두어야 할 역사"라고 했는데 정말 이런 인식을 갖고 있는 인사가 만에 하나 한러 외교의 책임있는 자리에 있다면 큰 일이다.
당시 러시아는 도둑질 경쟁에서 졌을 뿐이 아닐지.
다소 과격한 분석이긴 하지만,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들 속에 끼어 살며 미래를 모색하려다 보니 우리 속에 있는 '외교 낭만주의' '외교 파퓰리즘'에 찬물 껴얹는 얘기는 아낄 수가 없다.
정말 평화체제로 가려면 여전히 한미-한일동맹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 중시정책‘(Pivot to Asia)’은 아시아에서의 한국, 일본, 호주, 필리핀 등과의 동맹 강화, 인도와의 협력 증진 중국과 러시아와의 협력관계 유지 발전을 통한 미국의 지도력 강화라는 폭넓은 전략개념이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진정으로 전쟁없이 평화로 가려면 아직 우리는 이 틀에서 보조를 맞추는 것이 낫다고 본다. 물론 우리 정부의 속내가 '동북아평화협력'의 중심축이 중국 러시아라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적지만 말이다. 여전히 미국 일본은 가장 중요한 동맹이라는 사실을, 배짱좋은 손님 푸틴을 보면서 더욱 실감한다. (김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