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전쟁영웅 ‘국군포로’
    계속 ‘나 몰라라’ 할 것인가?

    이현오 /객원기자, 칼럼니스트

    국가를 위해 일신을 송두리째 바쳐온 ‘전쟁영웅’과 북한에 의해 강제 납북된 납북자를 더 이상 국가가 외면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육군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귀환 신고합니다.” 1994년 10월 24일, 최초의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당시까지 군인 신분 유지)가 국군 수도 통합병원에서 국방장관에게 신고한 내용이다. 당시 이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우리 국민의 심금을 울렸었다
     
    그리고 2006년 11월 21일 오전 7시 30분 분당 서울대병원. 6·25전쟁 중 강원도 현리 한석산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돼 43년 간 북한 땅에 억류되었다 북한을 탈출해 꿈에도 그리던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국군포로 구출 운동에 전념하다 사망(죄졸중)한  故 조창호 예비역 중위의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영결식에서 지금은 고인(故人)인 박세직 재향군인회장은 조사를 통해 "여생을 오직 북한 억류 국군포로들의 조기송환을 위해 바치신 고 조창호 예비역 중위님의 영전에 750만 향군회원과 더불어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며 "불굴의 투혼을 불태운 참 군인으로서, 국군포로 송환과 그 가족 돕기 운동의 선구자로 신명을 불태웠던 큰 발자취가 더욱 고귀하게 느껴진다"고 애도를 표했다. 조창호 중위는 6․25전쟁 이후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 1호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조 씨의 장례에 무관심했다. 관례와 선례를 따지기에 앞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포로로 붙잡혀 기구한 운명을 살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전쟁 영웅’ 의 장례는 마땅히 국가기관이 나서야 했다. 정부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국가가 무관심하니 재향군인회가 나서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大韓民國在鄕軍人會葬)으로 거행했다.
     
    김대중 정권 때는 조 씨가 국군포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갖던 날, 기관원들이 “기자회견은 국가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일”이라며 막았다. 이에 조 씨는 “난 다만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데 그게 어떻게 위협이 되느냐”며  “이것이 제가 북한 땅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입니까. 나라를 지키다 적군에게 붙잡혀 지옥 같은 땅에서 살아온 국군포로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나라를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까.”고 가슴 속에 쌓인 분노와 한(恨)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국군포로 관련 문제는 거의 금기시 되다시피 했다. 북한 정권은 지금도 국군포로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조창호 중위의 귀환은 일대 파란이었고, 이후 우리사회에 지대한 격론이 일게 되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53년 7월27일 정전(停戰) 이후 돌아오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 포로는 어림잡아 10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 중 정부와 학계는 국군포로 500명 정도가 북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 생사파악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아니 생사파악은 고사하고 북한을 탈출해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탈북 국군포로와 납북자들마저 우리 관계기관이 모른 채 외면하고 냉대해 왔으니 과연 이게 국가를 위해 일신을 송두리째 바쳐온 ‘전쟁영웅’과 자국민을 대하는 국가기관의 처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억에도 생생하지만 지난 2006년 11월 국군포로 장무환씨가 1998년 駐中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가,『도와줄 수 없다』며 매몰차게 전화가 끊겨버린 이른바「대사관 녀」동영상이 재공개돼 국민적 공분(公憤)과 함께 외교부가 공식사과하며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당시 방송에서 張씨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나 국군포로인데 한국대사관 맞습니까』고 묻자, 여직원은『맞는데요』라고 대답한 뒤 張씨가『좀 도와줄 수 없는 가해서…』라고 하자 『아 없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답한 뒤 전화를 끊어버린 사례였다. 우여곡절 끝에 장무환씨는 98년 8월10일 북한을 탈출, 납북자단체의 도움으로 9월30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를 통탄케 한 사건도 부지기다. 육군 8사단 소속으로 형 만순씨와 함께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1953년 6월 중부 전선「김화」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된 한만택씨가 2005년 12월27일 탈북 했다가 하루 만에 중국 공안(公安)에 체포된 뒤 강제북송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우리 정부의 무사안일한 대처가 요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그 때 한 씨는 하루 만에 북송된 것이 아니라 다음해인 2006년 1월6일까지 중국에 억류됐던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再탈북을 시도하다가 발각돼 평안남도 북창정치범 수용소(평남 북창군 18호 관리소)에 수감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韓씨의 한국 내 가족(조카)은 2006년 1월31일 청와대를 찾아 정부의 대처방식에 항의하며 한만택씨에게 수여된 화랑무공훈장을 반납했다. 송환촉구 탄원서 제출과 함께.

    국군포로 뿐만 아니라 북한을 탈출해 중국 등지에서 고국으로 구명을 탄원하는 전후 납북자출신의 가슴을 후비는 사연들이 매해 언론을 장식한다. 그 중에서도 1998년 탈북한 최초의 납북어부 이재근씨가 중국 칭다오(靑島)영사관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영사관 직원이『당신 세금 낸 적 있어요? 왜 국가에 부담을 주려고 그래요?』라고 면박을 준 사건은 해외 영사관이 외국에서 자국민(自國民) 보호를 위한 어떤 사고와 행동을 취해 왔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예이기도 했다.
     
    천만다행 이재근씨는 2년간 중국을 방황하다가 당시 月刊朝鮮과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등에 구출돼 2000년 여름 귀국했었다. 이 시기(김대중-노무현 정권) 우리사회의 국군포로, 납북자문제는 한마디로 귀찮은 문제, 생각하기 싫은 존재에 다름 아니었다.

    6․25전쟁 63주년인 25일 국회는 본회의에서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를 조속히 송환할 것을 북한 당국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국군포로 송환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측 협조 요구를 조건 없이 즉각 수용할 것을 북한에 요구하고, 정부에 대해서도 북한 당국과 대화를 포함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을 주문했다. 정부가 국군포로의 정확한 실태 파악에 노력하고 구체적 송환 대책을 수립할 것도 요청했다.

    이제는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아니 주문하고 또 촉구하며 세부 대책을 강구해야한다. 국민을 위한 복지는 다른데서 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다. 국가를 위해, 사회를 위해 헌신․희생한 이들에게 최우선적으로 돌아 가야한다. 국회가, 정부가, 국민과 사회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송환에 얼마나 열린 마음, 열린 정책, 추상같은 집행으로 해야 하는가를 낱낱이 헤아려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귀환 국군포로는 80명, 북한 억류 생존 포로는 500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생존포로가 두 자리 숫자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관련 단체에서 나오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줄 안다.

    그만큼 시간이 없다. 6․25 63주년인 25일 아침, 국군포로 및 납북자회 회장인 최성룡 대표는 필자와의 전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국군포로 같은 경우는 연로해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정부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적극 나서야 합니다"고.

    6․25전쟁 당시 맥아더 연합군총사령관 휘하 부대 소속 KLO유격백마부대 함장으로 참전해 적선(敵船)을 섬멸한 전공으로 6․25 63주년을 맞아 화랑무공을 수상한 최성룡 대표의 부친은 1967년 연평도 해상에서 조업중 북한에 강제 납북되었다. 이후 다른 선원들은 돌아왔으나 최 대표 부친은 유격대 활동 전력이 드러나 억류돼 46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왜 국가가, 국민이 함께 서둘러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큼 시간이 없다.

    이현오(칼럼리스트, 객원기자. holeekv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