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 33차례 받은 미 의회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 영문 연설의 파문은?
  • 이승만(李承晩)의

    59년 전 美 의회 연설 내막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주미문화원장


  •      외국 국가원수의 미국 국빈방문 시 중요한 일정으로는 정상회담, 국빈만찬, 美 의회연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의회연설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기에 영합하고 유화적인 아이젠하워와의 정상회담을 통해서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한반도의 휴전, 동북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축출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에는 영어 통역이 필요 없었다. 그는 미국 최고 지성인 못지않은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그는 망명 시절부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연설문은 자신의 타이프라이터로 직접 작성해 왔다. 따라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의회연설 연설문은 어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고, 직접 타이핑해 준비했다.
      

  •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라는 책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도착한 후, 내가 처음으로 그와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의회연설 하루 전인) 1954년 7월 27일 오후였다.
    연설문이 몹시 궁금해 나는 이 대통령에게 초안을 주면 검토해 드리겠다고 제안했다.
    마침 그가 앉은 의자 옆의 바닥에 서류 가방이 놓여 있기에 나는 그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재빨리 가방 위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채근했다.

    ‘제발 훑어보게 해 주십시오. 다시 쓰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혹시 작은 부분이라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아니, 안 됩니다.’

    이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싫소이다. 난 휴전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미국에 온 것입니다. 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하렵니다. 당신은 내가 할퀼까 봐 내 손발톱을 손질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되오.’

    그는 서류 가방을 집어 들어 가슴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의회에서의 담화는 나 자신의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주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으며 나는 내가 쓴 방식대로 그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나는 망설였다가 다시 한번 연설 초안을 보려고 시도했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美 의회연설 당일인 1954년 7월 28일 오전, 다른 일정을 일절 소화하지 않은 채 연설문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슬렀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美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한다는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누구와도 사전협의 없이 자신이 준비한 영어 연설이 과연 미 상하원 의원들은 물론, 언론 등 미국 여론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게 될지 본인으로서도 무척 초조하고 궁금했다.
      
        7월 28일 오후, 워싱턴의 미 의사당 대회의실은 분주했다. 다수의 사진기·조명등이 설치되고 상하원 의원 및 이날 행사에 특별히 초청받은 각료, 대법원장 및 판사, 외교사절들을 위한 의자가 추가로 반입됐다.
      
        미국과 전 세계의 기자들을 위해 2층에 취재석이 마련됐고,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이 대통령의 연설문이 등사(당시는 복사기가 발명되긴 했으나 널리 실용되지 못하던 시절이었음)돼 기자들에게 배포됐다. 방청석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특별 입장권을 소지한 방청객들만 좌석이 마련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회의실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32분이었다. 윌리엄 노울랜드(William F. Knowland, 1908∼1974) 미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의 안내로 이 대통령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때 의정 단상에 앉아 있던 닉슨 부통령 겸 상원의장, 조셉 마틴(Joseph William Martin, Jr. 1884∼1964) 하원의장이 일어섰고, 마틴이 의사봉을 세 번 두들기자 회의실 내의 모두가 기립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윽고 李 대통령이 연단으로 안내됐으며 마틴 의장이 “미국 국민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자유를 위한 불굴의 투쟁가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소개말을 건네자 다시 장내에 열띤 환호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장내가 잠잠해지자 이 대통령은 마틴에게 간단히 감사를 표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 역사적인 영문 연설을 번역해 소개하고자 한다.
      


  • <이승만 대통령 미국 의회 영문연설문>


        “하원의장, 상원의장, 상하 양원 의원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저명한 미국 시민들이 모인 이 존엄한 자리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됐음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유서 깊은 의사당에 참석해 주심으로써 내게 커다란 영예를 베풀어 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여러분의 후의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 간직된 것을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 정부의 위대한 전통 일부이며, 이 전통이야말로 내가 반세기 이상이나 신봉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나도 여러분처럼 워싱턴·제퍼슨·링컨에게서 영감을 받아 왔습니다. 여러분처럼 나도 여러분의 빛나는 선조들이 全 인류를 위해 탐구했던 자유를 수호하고 보존하려고 스스로 맹세해 온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과 미국 국민이 행한 일에 대해 한국과 한국 국민을 대표해 끝없는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고립무원의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출해 줬습니다. 그 순간, 진정한 집단 안전보장의 횃불은 전례 없이 찬란히 빛났습니다. 우리 전선의 방어를 위해서, 또는 피란민과 기타 이재민들의 구호를 위해서 여러분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보내 준 원조는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고마움의 빚입니다.
      
        우리는 또한 한국 파병의 중대 결정을 내림으로써 우리를 바다 가운데로 밀려나지 않도록 구원해 준 트루먼 前 대통령, 그리고 당시는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지금은 미국 행정수반으로 敵의 위협을 잘 이해하고 우리를 원조해 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40년간 일본의 잔혹한 점령하에 있던 한국에 왔었습니다. 우리 국토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외국 친구들의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곳에 여러분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위대한 인물이 왔습니다. 여러분의 군대만이 우리의 자유를 회복해 주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어머니들에게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암울한 처지에 놓여 있던 시기에 그들은 미국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자식, 남편, 형제들을 한국으로 보내 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계곡과 산으로부터 한미 양국 군인들의 영혼이 하나님에게 함께 올라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마음속에 소중히 기억하듯이, 전능하신 하나님도 그들을 어여삐 품어 주실 것입니다.” 
       


  • “自由 守護” = “共産 打倒” 美國의 腦에 새기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6·25전쟁 지원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 데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지휘관과 미군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찬사도 잊지 않았다.
      
        “여러분의 거룩한 애국 장병들은 맥아더, 딘, 워커, 아몬드, 리지웨이, 클라크, 헐, 테일러와 같은 장군들의 훌륭한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1951년에도 역시 훌륭한 밴플리트 장군이 제8군을 지휘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청년들의 군인다운 용감한 정신, 그리고 가정과 조국을 위해 싸울 테니 총을 달라는 그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밴플리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큰 어려움 없이 한국 청년들을 제주도ㆍ광주ㆍ논산ㆍ기타 여러 곳에 모으고, 주한 미 군사 고문단의 장교들을 보내 주야로 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 청년들은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경이로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훈련받은 군대는 아시아를 통틀어 최강의 반공 군대로 알려졌습니다.
    이 병력이 전체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에서 바로 대한민국 군대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 병사들은 한국 육군을 강인한 ‘ROKs’라고 부릅니다. 이제 만일 미국이 이러한 육군 병력을 계속 증강시켜 주고, 공·해군력도 적절한 비율로 함께 증강시킬 수 있도록 원조해 준다면, 한국의 전쟁터에서 미국 병사들이 필요 없게 될 것임을 나는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     이쯤에서 서론을 끝낸 李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본론에 들어갔다.
    나지막하던 그의 목소리는 강하고 생기가 돌았으며 그는 웅변가로 돌변했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이렇게 한반도에서 大義를 위해 그들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그 전투는 아직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폭정의 군대는 아직도 全 세계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선에서는 현명치 못한 휴전에 의해 포화가 잠시 중단되고 일시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적은 이 기회를 무력을 증강시키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네바 회담도 예견된 바와 같이 하등의 성과 없이 끝났으니, 이제 휴전 종결을 선언할 적당한 시기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북반부는 소련이 조종하는 100만 명의 중국인 노예들에 의해서 점령·지배되고 있습니다. 적의 비행기들은 그곳에서 10분 이내에 우리 국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서울이 워싱턴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크렘린 내 음모자들의 최고 목표는 미국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련의 수소폭탄은 파괴된 우리나라 도시 위에 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대도시에 먼저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그 우방들이 소련의 공장들에 대해서 지금 폭탄을 투하해야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도살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세된 소처럼 그저 서 있어야만 하겠습니까?
      
        全 세계의 자유 국민들이 생존할 수 있는─우리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길은 오직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가 없을 때에 소망스러운 눈빛으로 평화를 기다리기만 하는 길이 아니며, 어떻게든지 소련 정부로 하여금 그 극악무도한 세계정복 노력을 포기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고 믿는 길도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거나 굽히지 말고, 세계의 세력 균형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움직여 설사 그들이 섬멸 무기를 소유하더라도 감히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전선은 우리가 승리하고자 하는 전쟁─아시아를 위한 전쟁, 세계를 위한 전쟁, 지구상의 자유를 위한 전쟁─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에게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주고, 또 다른 20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을 충원할 수 있는 군사원조를 요청했습니다. 150만 명의 한국 청년들의 최고의 목표는 인간의 자유, 그들의 명예,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 군인들의 용감성은 전투에서 증명됐으며,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 병사들은 세계의 그 어느 군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언급한 이래 미국인 중에서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 역시 여러분에게 무장 병력 63만 명과 예비 병력을 위한 군사원조를 추가로 요청했습니다. 중공은 그들을 반대하는 150만 명을 학살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자유중국 게릴라들이 중국 본토 내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250만이라는 병력을 가지고 있으나, 군의 충성은 결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포로가 된 1만4369명의 중공군이 대만으로 가겠다고 한 반면, 중공으로 귀환을 택한 자는 불과 220명이었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중공의 경제 상태는 극도로 취약합니다. 미국 해군에 의해 중국 해안이 봉쇄된다면 중공의 교통망은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중공 정권에 대한 반격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미국 해군과 공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미국 보병은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중국 본토가 자유 진영의 편으로 환원된다면, 한국 및 인도차이나 전쟁은 자동적으로 승리의 귀결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력 균형이 소련에게 극히 불리하게 기울어져 소련은 감히 미국과의 전쟁 모험을 시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는 한, 자유 진영의 궁극적 승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소련 정부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에 그 지상군과 공군을 투입하지 않을까요? 아마 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지상군 투입은 오히려 자유진영을 위해 아주 잘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련이 수소폭탄을 대량 생산하기 전에 그 제조 중심지들을 미 공군이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세계가 지혜와 용기만 있다면 충분히 공산주의를 타도할 수 있다고 말하고 결론으로 돌입했다.
      
        “나는 이런 내 주장이 강경정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힘든 세계,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류 문명의 존립을 가름할 운명이 바야흐로 우리의 최고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이상과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합시다.
    이러한 이상과 원칙들은 바로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인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에 의해서 선양됐고, 그 후 절반의 자유, 절반의 노예 상태로는 생존할 수 없다며 연방 수호를 위한 투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위대한 해방주의자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서 다시 주창됐습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반쪽짜리 공산주의, 반쪽짜리 민주주의 상태의 세계에서는 평화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시아의 자유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지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결정은 유럽ㆍ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에서의 세공산주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 “위대한 애국자” vs “세계대전 경계” 甲論乙駁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美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을 했다는 역사적인 성격을 갖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영어로 작성해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연설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연설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론·본론·결론이 분명한 매우 설득력이 있는 명연설로 보인다.

       그런데 근간에 국내에서 간행된 각종 저술에 보면, 李承晩 대통령이 이 연설을 한 다음 자신의 생애에서 최악의 연설이었다고 후회했다는 내용 일색이다. 이런 기록들은 필자의 고찰에 의하면 두 사람의 회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는 李 대통령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교수, 둘째는 한표욱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정무공사의 기록이다.

        올리버는 그의 저술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1978)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그것은 대단한 연설이었으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내가 기자들에게 배포된 연설문 등사본에 계산한 바에 따르면 박수갈채로 연설이 33차례나 중단됐다. (중략) 연설은 매우 흥미진진했으며, 기본적으로 정당한 주장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만일 개인이 그런 연설을 했다면, 아무도 나무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의 의회에서 행할 연설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이 대통령도 인식하게 됐다. 다음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그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올리버 박사, 내가 의회에서 했던 연설은 일생 동안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네.' 올리버 교수는 이런 내용과 함께 이 연설이 향후 한미관계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으며, 미국의 위정자들이 이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고 그의 후계에 대해서 공공연히 언급하게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책자 449∼450쪽)

        한편 한표욱 공사는 그의 저술 ‘이승만과 한미외교’(1996)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4년 7월 29일) 새벽 2시 반쯤 황규면 비서관이 나의 방을 노크해서 잠을 깼다. 李 대통령이 급히 찾는다는 것이었다. (중략) 대통령 방으로 갔더니, 첫눈에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李 대통령이 라디오를 가리키며, 방금 방송에서 내일 아침 뉴욕타임스 지의 사설을 읽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가 李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비난한 것이다. 사설 내용은 李 대통령의 연설이 미국 사람들의 무드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충동하고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자 227∼228쪽) 

    이승만 대통령이 과연 올리버 박사나 한 공사의 회고대로 의회연설을 일생일대의 최대 실수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올리버와 한 공사의 진술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들의 진술이 사실인지의 여부에는 회의적이다.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그들의 회고는 의회연설이 행해진 지 24년, 42년 후에 이뤄졌다. 그런데 당시 대한민국 공보처와 국방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대통령 각하 방미수행기’(1955),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1955), ‘Handbook of Korea’(1958ㆍ이상 공보처), ‘방미 이승만 대통령 연설집’(1954ㆍ국방부)에 실린 이 대통령의 의회연설문은 무엇인가?  
       李 대통령이 그렇게 후회하는 연설을 정부기관에서 대통령의 재가 없이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었을까?  

    둘째, 李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의 부정적인 사설을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韓 공사의 회고도 의문이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1954년 7월 28일 오후 5시가 넘어서 끝났다. 당시의 신문 발행 시스템 아래에서 사실보도라면 몰라도 부정적인 사설이 실렸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궁금했다. 그래서 당일자 뉴욕타임스를 검색해 보았으나 문제의 사설은 찾을 수 없었다.

    반면에 ‘Our Stand on Syngman Rhee(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내용의 독자투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려는 자신의 목표를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이번 이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환대를 우리의 동맹국이나 적들이 침략행위를 묵시적으로 승인하는 것으로 오해할 것이 틀림없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우리는 이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에 침략자 혹은 희생자가 공산주의자인지에 상관없이 침략에는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이 글은 델라웨어 대학의 펠릭스 오펜하임(Felix Oppenheim) 조교수가 기고한 글로 작성일자는 7월 27일로 돼 있다. 즉, 이틀 전에 쓰인 글이 7월 29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것이다.
    오펜하임은 李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듣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李 대통령의 7월 26일 도착 성명이든, 아니면 다른 발언을 보고 독자투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 대통령이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사설이 아니라, 논평란(Op-ed page:opposite the editorial pageㆍ사설은 보통 논설위원의 글이 무기명으로 실리는데 반해, 논평은 외부인사의 글이 기명으로 소개되며 둘은 대개 같은 페이지에 실림)에 소개된 오펜하임의 독자투고로 보인다.  


      


  •    이미 소개했듯이 이 대통령은 홍보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열정이 자칫 실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의회연설의 사례에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다양한 뉴스를 접하지 못하고, 7월 28일 밤 라디오 방송을 듣고 당황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뉴욕타임스의 사설이 아니라 독자투고에 놀랐던 것이다. 韓 공사의 말을 빌자면, 李 대통령이 3∼4시간의 수면을 취하고 7월 30일로 예정된 미국 외교기자클럽 연설을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7월 29일 아침 9시에 워싱턴 생가를 방문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건강이 걱정스러웠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통령ㆍ수행원ㆍ대사관 직원들이 조금만 침착하게 언론보도를 체크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고 믿는다.
    사실 李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룬 것은 뉴욕타임스가 아니라, 7월 29일자 워싱턴포스트의 1면과 4면에 실린 장문의 기사였다.


    ‘이 대통령, 미국의 지원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전쟁 요구(Rhee Calls for War on Reds Aided by U.S.)’라는 제목의 기사는 물론 쇼킹한 뉴스를 전했지만, 객관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어제 상하원합동회의에서
    미국의 해군과 공군의 지원하에 한국과 중화민국 군대가 중공군을 공격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매우 솔직한 어조로 그러한 전쟁이 ‘아마’ 소련으로 하여금 중공을 돕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이 수소폭탄으로 무장하기 전에 미 공군이 그 생산시설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세계로서는 썩 좋은 일이라고 천명했다.” 


    “이 대통령은 연설하기 전과 하는 동안, 그리고 한 후에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시아에서의 대전쟁을 시작하자는 그의 제안에 대해 청중들은 완전히 몰입했으나, 모두의 말문을 닫고 조용함으로 일관했다. 의원들은 이 대통령에 대해 애국자이자 정치 지도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79세의 노 정치인이 23분간 무기에 호소하자는 데 대해서는 큰 경계심을 피력했다.”

     “하원의장 조셉 마틴은 전쟁 제안의 대화조차 거부했으며,
    알렉산더 윌리 상원의원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연설을 행한 위대한 애국자의 말을 들었다’고 논평했다.

    해리 잭슨 상원의원은 ‘이 대통령의 제한적인 예방전쟁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나,
    라이언 도른 상원의원은 ‘조만간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며 이 대통령을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