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최진실은 사망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인터넷을 검색하면 ‘최진실 지옥의 소리’가 떠돌아 다닌다. 어느 교회의 여자 전도사가 방언기도를 하면서, 최진실이 하는 이야기라며 중계해준 음성파일이다.

    이 교회 전도사가 주장하는 내용은 최진실이 자살했기 때문에 지옥에 있다는 것, 지옥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 말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서 회개하고 자기처럼 지옥으로오지 말라는 내용이다. 수십분 동안 계속된 방언기도와 통역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너무나 처절하고 간곡하고 애절하다.

    최진실은 과연 어디로 가 있을까? 이것을 얘기하려면 몇 가지 거북한 주제를 피해갈 수 없다.

    ◯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사후의 세계가 있다면, 사후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 어떤 사람이 천국가고, 지옥가는가?
    ◯ 그렇다면 나는?

    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천국과 지옥은 있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있다, 아니면 없다...이다.

    없다...면, 더 이상 아무 말이 필요하지 않다.
    사후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의외로 많다. 그렇지만 그들의 생각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냥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진짜로 없다고 믿지는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없다고 머릿 속에 입력됐을 뿐,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면 사후 세계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착하게 살아야 하고, 좋은 일 하고 살아야 하고, 잘 살아야 하고, 남에게 이롭게 해야 한다고 그냥 생각한다.

    물론 그 반대도 많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을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분노한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설명하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선한 모습도 있고 악한 모습도 있다. 착한 일을 하면 괜히 으스대고 싶어하지만, 악한 일을 하면 괜히 구석으로 들어가고 싶다.

    사후 세계가 없다고 하면, 여기서 글을 중단하고 내려야 한다. 끝 하고 마무리하면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있다는 쪽으로 나가가야 한다(농담이다). 인간이 죽은 다음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귀신의 존재라든지 ‘천벌을 받으라’는 말도 그렇고, 사망하는 것을 ‘돌아간다’는 표현으로 하는 것에서도 죽음은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뿌리깊은 생각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그 사후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모든 종교와 모든 가르침을 가지고 사후의 세계를 논하려면 일생을 다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전통과 신화와 구전을 뒤져야 하겠지만, 이 짧은 인생 일생을 그런 일에 쏟으며 사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다.

    일단 최진실 음성파일을 퍼뜨린 사람은 교회 여 전도사였으며, 지옥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니,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는 지로만 한정하는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성경은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지옥과 천국이 어디 있어? 또 그소리? 하시는 분 여기까지만 읽고 다른 곳으로 가시길….

    사후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죽음(death) 이후의 세계에 대해 성경은 지옥과 천국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스올이라는 단어도 나오고, 무덤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이중 천국과 반대되는 의미로 씌여진 말은 지옥(hell), 하데스(hades), 스올(sheol), 무덤(grave)등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됐다. 한국말로 음부(陰府)라는 단어도 등장하는데, 음부가 어떤 때는 스올을 말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지옥을, 어떤 때는 무덤을 말하기도 했으니 일단 제외하자.
     
    성경에는 결국 인간의 죽음(death) 이후에는 인간이 갈 수 있는 곳으로 ▲좋은 쪽의 내용으로는 낙원(paradise) 천국(kingdom of heaven) 셋째 하늘(third heaven) 영생(eternal life) ▲나쁜 쪽으로는 스올(sheol) 하데스(hades) 지옥(hell) 무덤(grave) 불못(lake of fire) 무저갱(abyss) 등의 말로 표현한다.

    가장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곳은 지옥(hell)이다. 한국어 표현에서 지옥은 영어로는 hell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가?
    참 신기하게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지는 몰라도, 다국어 성경사이트(holybible.or.kr)에서 hell이 들어간 문장을 검색하면 첫 번째 다음과 같은 문장이 뜬다.

    You serpents, you brood of vipers, how will you escape the sentence of hell?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 문장은 성경 중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마태(Matthew)라는 사람이 쓴 복된 소식(복음 福音)이란 뜻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렇게 독한 말,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엄청난 독설과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한 말이다. 이 말을 누구에게 했을까? 놀라지 마시길. 기독교의 뿌리가 되었으며 2000년전 사람들의 종교를 이끌었던 유태교의 서기관(scribe)과 바리새인(Pharisees)들에게 쏟은 저주이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잘 꿰고 있으며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으나, 율법으로 일반인들을 얽어 매면서 종교를 가장하여 못된 짓을 일삼는 종교적-세속적 지도층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타락한 성직자들, 법률가들,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옭아매서 꼼짝달짝 못하게 만드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말한다.

    하지만 외부적으로 보자면, 기독교의 뿌리를 이루었던 유대교의 타락상을 지적했으니 말하자면 자정노력을 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정의는 이쯤해서 줄이고, 기독교의 시조인 예수 그리스도가 어째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강력하게 비난했는지 혐의내용을 더 살피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화가 미칠지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은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았구나.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But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you shut off the kingdom of heaven from people;
    for you do not enter in yourselves, nor do you allow those who are entering to go in.

    화가 미칠지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이 위선자들아
    왜냐하면 너희들은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리는구나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because you travel around on sea and land to make one proselyte;
    and when he becomes one, you make him twice as much a son of hell as yourselves. 

    이 뒤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가 미칠지어다’라는 강한 저주가 4번이나 더 나온다.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이러한 저주와 비난을 한 다음에 나오는 말이 바로 위 문장이다.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피를 쏟는 듯한 절규와 저주를 퍼붓는 이유도 바로 천국과 지옥과 연결된다.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끌어 가야 할 임무를 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천국문을 막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도리어 사람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반대의 일을 하기 때문에 이같은 진노의 대상이 됐다.

    You serpents, you brood of vipers, how will you escape the sentence of hell?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지옥에 대해서 가장 많은 말을 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hell)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hell)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hell)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생 손을 칼로 잘라버리면 얼마나 아프고, 일생동안 얼마나 불편할까? 돈은 벌 수 있을까?
    생 발을 찍어 버리면 얼마나 아프고, 일생동안 얼마나 불편할까? 돈은 벌 수 있을까?
    두 눈을 빼어버리면 얼마나 아프고, 일생동안 얼마나 불편할까? 돈은 벌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서 지옥가는 것 보다 살아서 이런 고통을 겪고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옥은 구더기가 죽지 않는 곳이다.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구더기가 갉아먹는다. 꺼지지 않는 불이 타는 곳이다. 지옥에 빠진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불에서 소금구이하듯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글을 읽으면 픽, 웃음이 나올지 모르겠다. 공포감으로 뒤덮일지도 모른다. 혹은 힘이 쭉 빠지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갑자기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한 말로서 성경에 기록된 문자이다.


    지옥은 과연 있는가?

    이런 글을 읽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대충 이렇게 나뉜다.

    1. 거짓말이다.
    2. 겁을 줘서 착하게 살도록 만들기 위한 선한 거짓말 또는 비유이다.
    3. 진짜 그렇다면 어떡하지?

    대부분은 1,2번으로 생각한다. 특히 2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렇지만, 곰곰 생각해보자. 김정은이 얼마 전 자신에게 반발하는 군 지휘관들을 박격포로 쏘아서 죽였다는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다. 과연 그랬을까? 하고 반신반의하는 사람은 아마 이제는 없을 것 같다. 하도 북한 정권의 괴상망칙하고 지옥같은 만행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직접 겪은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나왔으니까. 김정은이 그렇게 하는 것 봤어? 봤냐고?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박격포로 쏘아 산 사람을 산산조각냈는지 어떻게 알아? 비유이겠지, 설마...어떻게 임신부를 널빤지로 밟아서 죽였겠어? 봤어? 봤냐구? 김정은이 그 정도로 강압적으로 비판을 했다는 비유겠지... 설마 사람인데...

    이런 비유가 있다. 어느 목회자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하고 특히 지옥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리쳐 외쳤다. 그때 한 사람이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지옥을 내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당신의 말을 절대 믿을 수 없다”고. 그 때 한 맹인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서울에 넓은 강이 있고 그 강 이름이 한강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절대 믿을 수 없다. 내가 보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은 일제히 그 맹인을 비웃었다. 보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때로는 진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맹인의 허튼 소리와 똑같은 것이다.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는 수개월간의 내전으로 50만명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한 적이 있다. 그때 외신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지옥에는 악마가 없다. 다 르완다로 왔으니까.

    김정은이 과연 박격포로 반대하는 군인들을 쏘아서 산산조각을 냈을까? 하고 의문을 갖든 말든, 왜 김정은은 그렇게 행동했을까? 하는 온갖 상상과 해석과 의구심과 변론은 다 무의미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벌어진 것이고, 안 벌어졌으면 안 벌어졌을 뿐이다. 그 일이 나한테 안 벌어진 것을 감사할 뿐이다. 나에게 벌어졌다면, 이 세상의 고상한 모든 담론과 이론과 상아탑의 모든 학설은 아무 쓸모없는 환상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고, 창조주이고, 심판자이고, 구원자임을 믿는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상식이 있는 학자들은 최소한 예수를 세계 4대성인의 한명으로 꼽는다.

    절대적인 구원자이든, 세계 4대 성인이든 아무튼, 우리 보통 인간보다는 몇 십 배 몇 백 배 높은 위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쨌든 지옥이 있다고 말했고, 지옥은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꺼지지 않는 불이 사람을 소금구이 하듯 태우는 고통스러운 곳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옥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요, 이 세상에 사는 수십억명의 기독교인들은 거짓말쟁이를 따른 것이 된다.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이 세상에 얼마나 끔직하고 인간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잘은 모르지만 어렴풋하게는 안다. 현실세계에서 그런 지옥같은 일들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보다 더 잔혹한 일이 있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한가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지옥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덤도 이야기하고, 하데스도 이야기하고, 꺼지지 않는 불못(lake of fire)도 말하고, 바닥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무저갱(abyss)도 나온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가장 헷갈리게 하는 사후의 세계는 스올(sheol)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이것을 어느 부분에서는 스올이라고 번역한 곳도 있고, 어느 곳에서는 음부(陰府)라고 번역한 곳도 있다. (지옥을 음부로 쓴 부분도 있으므로 논란의 여지는 남는다.)

    사람들을 더욱 헷갈리게 하는 것은 영어성경에서도 어떤 번역본은 이 단어를 쓰는 곳이 있고, 다른 번역본에서는 이 단서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보는 KJV (King James Version)에서도 이 단어는 쓰지 않는다. 다만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는 스올(Sheol)이라는 단어가 65번이나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이 단어를 사용할 땐 모두 다 대문자로 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올’이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본 것이다.

    스올은 NIV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무덤(grave)으로 번역했고, KJV 성경은 스올을 무덤(grave)이나 죽음(death)으로 쓴 곳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지옥(hell)으로 쓴 곳이 훨씬 많다.

    결국 서양 신학자들의 의견도 특히 스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나뉜다. 스올을 지옥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무덤으로, 혹은 죽음으로 보기도 하지만, 특이하게 어떤 특정한 장소로 보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분법적으로, 흑과 백으로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도직입(單刀直入)해서, 죽은 뒤 천당갈래, 지옥갈래? 라고 들이대지만, 정말 너무나 악해서 “저 인간은 지옥가야해”라고 저주할 사람도 있지만, '저런 사람은 천당가는 거야? 지옥가는 거야?' 헷갈리는 보통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대충 살았는데, 이러고 천당갈 지 지옥갈 지 헷갈리는  보통사람들은 이런 말에 휩쓸리기도 하고 저런 구절에 휘둘리면서 하루하루 지내다가 어느 날 그의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었으나, 숨이 꼴딱 넘어가기 직전까지 한 번도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다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허둥지둥대면서 삶의 종착역을 맞는 것이 또한 인생이기도 하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영생을 얻는지 낙원으로 가는지 천국시민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스올로 머무는지 지옥으로 떨어지는지, 무덤에 들어가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머무는지 혹은 귀신이 돼서 구천을 떠도는지 혹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그냥 없어지는지 헷갈린다고 해도 누구든지 확실하게 헷갈리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누구든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물론이거니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언젠가 죽는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절체절명의 확실성 속에서 사람들은 몸부림치지만, 어느 누구도 이 거대한 사실을 조금이라도 변경시킨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혹은 부모가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 가끔 저 운명이 내 운명이 되겠거니, 하다가도 막상 장례식장을 떠나면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하루하루 개미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사람들이 사용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은 꼭 죽는다.

    사람들은 확실히는 몰라도 대충 짐작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일은 진행된다는 것이다. 내가 천국이 있다고 혹은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천국에 가고 싶었는데 그리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나락으로 떨어진 경험, 한 두 번은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다.

    대학교 시험을 치렀을 때 그랬고, 입사시험을 치렀을 때 그러했다. 내가 밤을 새워 죽을 힘을 다해 공부를 하고 원하는 대학교에 원서를 내고 최선을 다해 백일기도도 하고 새벽기도도 해서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뤘는데, 내가 어떤 사람을 죽도록 좋아해서 나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믿었고 다짐하고 노력해서 나만의 낙원을 생각했으나, 나는 떨어졌고, 그녀는 나를 떠나갔다.
    이 사람에게 그 당시는 낙방이 지옥이고 실연이 지옥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낙방이든 실연이든, 나의 생각과 나의 바램과 나의 노력과 나의 기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결과가 그 정 반대였던 일들도 어디 한 두 번이었을까?

    마찬가지로 지옥이 있거나 천국이 있거나 하는 것도 나의 생각과 기대와 신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지옥이나 천국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내가 천국에 갈 지 지옥에 갈지 하는 것이 나의 생각과 신념과 노력과도 또한 상관없이 결정됨을 우리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먼저 지옥부터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적인 기준은 ‘~하라’는 말 보다 ‘~하지 말라’는 말이 더 많다. 천국은 좋은 곳이므로 그곳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주의사항이 많이 필요없다. 하지만,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너무나 비참하고 잔혹하며 파멸시키는 일이므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옥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과 관념은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비논리적이거나, 교조적이어서 한 두 마디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운명에 너무나 중요한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 자체가 두루뭉실하거나 일방적으로 진행이 되다 보니 일종의 금기 비슷하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서 피하려는 사람이든지, 혹은 그곳을 동경하여 가기를 바라는 사람이든지 우리는 이 중요한 존재에서 대해서 알아야 하므로 이 고통스런 성찰에 여러분들을 초청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