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부님, 꼭 이래야 합니까?

      ‘평화의 섬 천주교연대’라는 이름을 내건 수도자, 성직자 3711명이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사제, 수도자 선언’이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참여단체는 전국 15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천주교 여자수도자 장상연합회, 남자 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연합회, 평신도 단체인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등이다.

      이만 하면 꽤 많은 인원과 단체를 동원한 모양새다. 그러나 신학 문제도, 교리 문제도, 윤리 문제도, 인도적인 문제도 아닌 정책 문제를 가지고 “찬성 반대 중 오직 반대만이 진리니라” 하는 식으로 나오는 방식은 수긍하기 어렵다. 정책에 어찌 찬반양론이 없을 수 있는가? 그런 한에는 그런 문제는 4대강 문제도 마찬가지였지만, 찬반을 개인들 각자의 양심과 의사(意思)에 일임할 일이다.

      그러지 않고 오직 반대만을 진리로 성화(聖化) 시켜서 그것을 마치 ‘신학적 당위’인양 자임한다는 것엔 문제가 있다. 그런 식으로 찬반이 엇갈리는 세속의 모둔 주요 정책논란에 개입하여 “찬성만이 진리다” “반대만이 진리다” 하며 교단의 이름을 내걸고 집단행동을 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교회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당적이요, 운동적이다. 모든 종교단체들이 이처럼 종교행위의 형식을 빌어서 정당적, 운동적 집단행동을 벌이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종교 원리주의 판으로 역주행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갖게 된다.

      오는 11월 14일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3천 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도 연다는 소식이고 보면 종교계 일각은 아마도 제주 해군기지 반대 이슈를 한진 중공업 투쟁과 한미 FTA 반대 투쟁 등과 맞물리는 일대 반정부 투쟁으로 돌입할 모양이다. 종교인들이 참다 참다 못해 광범위한 민심의 연장선상에서 집단 저항대열을 형성하는 사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예컨대 혹심한 인권탄압이 자행된다든가 할 때였다.

      그러나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찬반토론의 문제일지언정, 종교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신학적 계명의 이름으로, 윤리의 이름으로, 인권의 이름으로, 인도(人道)의 이름으로, 선악(善惡) 대결의 이름으로  “오로지 반대만 해야 옳다”고 규정해서 이단(異端)에 대한 '종교재판'이나 '십자군 전쟁'을 할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평화는 해군기지 같은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는 주장도 평화를 위한 그 나름의 어엿한 양심이다.

      교회 안에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세속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운동권적’인 현상에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세(勢)에 눌리고, 매도(罵倒)가 신경 쓰이고, 싸우는 게 싫고 귀찮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맞바람을 조직하고 동원할 만한 역량과 태세가 되어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들 찬성하는 교인들의 양심과 의사는 아예 묻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채 “이게 교단의 입장이다” 하는 식으로 ‘작품'을 '제작(製作)'해 가는 것은 아무래도 씁쓸하다.

      종교계까지도 바람의 정치, 세(勢)몰이의 정치, 현상타파의 정치, 대중동원의 정치를 닮아가고 있는가? 공교육 현장, 노동현장, 문화계와 대중연예계, 역사교과서 서술...등 여러 부문에서 ‘변혁’의 바람몰이가 성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종교계 일각마저 그 작위적인 소용돌이의 한 축으로 나서는 결과가 된다면 그것은 종교계로서의 고매한 영성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건 물론 별 볼일 없는 한 개인의 양심이요 소견일 뿐이다.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