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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고 섬세한 성품이지만 한번 세워진 원칙은 소신과 강단을 갖고 밀어붙이는 '전략가'형이다.
역대 최장수 6자회담 수석대표이면서도 6자회담 본무대에 '데뷔'하지 못했지만 대화-압박의 '투트랙' 전략으로 북한을 남북 비핵화회담의 장(場)으로 이끌어낸 최초의 북핵 협상대표로 기록될 전망이다.
정세판단과 전략수립 능력을 갖춘 외교부의 대표적 '북미ㆍ북핵통'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통(通)'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미국 몬터레이 군사언어연구소에서 러시아어를 연수하고 주러 대사관에서 1등서기관으로 근무한데 이어 본부에서 러시아 담당 동구과장을 역임하는 등 러시아 전공 '삼박자'를 갖춘 유일한 인물이다.
특히 한ㆍ소 수교의 물꼬를 튼 1989년 11월 영사처(consular department) 설치 협상과정에서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실무적으로 참여, 협상 진전을 이끌어냈다.
제2차 북핵위기가 발발한 2003년 북미국장으로서 북핵 업무를 담당했던 그가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던 기간은 북핵 외교의 명암이 교차된 시기였다. 2009년 3월부터 2년6개월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맡아 역대 최장수 6자회담 수석대표로 기록됐지만 재임기간 6자회담에 단 한차례도 참석하지 못한 유일한 수석대표이기도 하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없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기조에 입각, 압박과 대화의 '투트랙' 전략으로 북한의 태도변화를 유도하는 데 주력했고 "6자회담 자체보다 비핵화라는 본질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북한의 천안함ㆍ연평도 도발 이후 6자회담이 열리지 않는 기간 사상 최초로 남북 비핵화 회담을 성사시킨 점은 의미 있는 족적으로 평가된다.
북핵 문제를 놓고 역대 최상의 한ㆍ미 공조와 한ㆍ미ㆍ일 공동전선을 유지시킨 외교적 노력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이를 토대로 위 본부장은 남북대화의 '중심성'을 6자 내부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북핵 협상에 대해 6자회담의 울타리를 넘어 총체적 접근을 시도한 점도 평가할 대목이다. 다양한 양자ㆍ다자접촉을 통한 '장외협상'을 중시하고 중국 변수와 북한 내부정세를 총체적으로 고려하는 차별화된 접근방식이었다는 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예술적ㆍ문학적 소양에 문재(文材)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화가인 부인 김상학(56)씨와 2남.
▲전북 익산(57) ▲남성고. 서울대 외교학과 ▲외시 13회 ▲주러시아대사관 서기관 ▲외무부 동구과장 ▲대통령비서실 파견 ▲주미 참사관 ▲북미국장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책조정관 ▲주미공사 ▲장관 특별보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