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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선언은 ‘홉킨스의 드라마’...이승만과 통했다

美-영국이 군사적 이해갈등으로 회담은 난장판 계속루즈벨트 측근 홉킨스, 선언문 단독작성..'한국 독립' 조항 넣어일본은 무조건 항복 합의, 조건부였으면 한국독립 지연될수도

입력 2011-09-14 20:47 수정 2011-09-15 07:55

▲ 사진 = 14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로 ‘제7회 이승만포럼’이 열렸다. ⓒ뉴데일리.

“한국 독립 조항이 카이로 선언에 들어간 것은 미국인 해리 홉킨스의 단독플레이..기적이었다.”

백석대학교 정일화 교수는 14일 한국이 자유국가 건국을 조속히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만든 루즈벨트 대통령의 측근 홉킨스의 놀라운 외교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 사진 = 정일화 교수가 ‘카이로 선언과 대한민국 독립’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뉴데일리.

카이로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 소련의 스탈린 등이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한국을 자유독립시키기로 합의한 선언이다.

정 교수는 이날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로 열린 ‘제7회 이승만포럼’에 강사로 참석, ‘카이로 선언과 대한민국 독립’을 주제로, 카이로 선언에 ‘한국 자유독립’ 조항이 들어가게 된 당시 국제적  배경 및 과정과 이승만 박사의 업적 등을 소개했다.

정 교수는 “카이로 회담이 열릴 당시 세계 그 어떤 나라도 '코리아'에 관심을 갖는 나라는 없었다”면서 “카이로에서 회담이 시작됐을 때조차 공식적 의제로 한국은 등장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카이로 회담 당사국인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 나라 모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쳐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다 주요 의제가 군사전쟁문제여서 한국문제가 끼어들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특히 “당시 영국은 빼앗긴 식민지를 되찾는데 혈안이 돼 있었고, 소련 또한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던 상태여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거론하는 얘기가 나오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카이로 선언문이 나오기 직전까지도 공동성명서 작성을 위한 공동성명기초위원회조차 만들지 못할 만큼 회담은 날마다 말싸움만 계속되는 난장판이었다고 한다.

정교수는 “루스벨트의 특별보좌관이었던 홉킨스는 당시 처칠과 스탈린 등을 일일이 만나며 얽혀 있던 갈등관계를 외교력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면서 “카이로 선언문의 초안 또한 그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단언했다.

초안이 만들어진 순간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홉킨스가 회담 막바지에 백악관문서기록관인 코넬리우스를 불러 ‘한국의 자유독립’을 담은 선언문을 홀로 구술해서 만들어냈다면서 “어떤 문서나 메모도 없이 머리 속에 떠오른 내용을 그대로 내뱉어 작성된 것이 바로 지금의 카이로 선언문의 초안”이라고 했다.

이 초안은 루즈벨트의 승인을 얻은 뒤 처칠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적당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라는 문제의 구절을 삽입했다고 밝혔다. ‘In due course’라는 구절은 처칠이 평소에 말버릇처럼 애용하던 문구였다.

정 교수는 “공동성명을 엄두 못낸 카이로 군사 정상회담에서 ‘카이로 선언’을 일궈낸 것은 ‘약소국들을 구하는 전쟁’을 벌인 루스벨트의 철학과 그의 측근 해리 홉킨스가 결합된 기적”이라고 강조했다.

장총통의 제안설등은 근거없는 허구

또한 그는 당시 중국의 장제스가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조항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중국 또한 영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을 몰아낸 후 옛 식민지였던 한국땅을 얻으려 했다”면서 “일본에게 빼앗긴 한반도를 청일전쟁 이전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중국의 야심”이었다고 일축했다. 이 같은 사실은 장제스와 단독회담한 루즈벨트가 처칠에게 “그의 목적은 한국의 재점령”이라고 밝힌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정 교수는 이승만 박사와 홉킨스의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이 박사와 홉킨스는 독실한 감리교신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박사나 홉킨스가 미 의회 내 감리교출신의 의원들과 왕성한 교류를 했었던 점을 감안하면 둘 사이에 분명 어떤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정 교수는 추측했다.

정 교수는 또 이 박사와 루스벨트의 부인 일리노어 여사와의 관계도 언급했다. “일리노어 여사가 미국적십자총재를 맡고 있던 시절 일본 정부와 한국의 기근사태 지원문제를 놓고서 ‘진실게임’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 때 이 박사가 일본의 거짓 증언을 밝히는 데 앞장서 일리노어 여사가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갖도록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음은 정 교수가 이날 발표한 주요내용이다.

카이로 선언과 대한민국 독립

                                  정일화(백석대 교수, '카이로 회담' 저자)

우리나라 역사는 5천년 동안 동양사상 또는 동양적 한국사상으로 내려오다가 대한민국시대에 이르러 자유, 평등, 민주라는 전혀 새로운 서구사상의 역사를 살게 되었습니다. 북한과 남한을 비교하면 북한은 한 사람의 절대자를 정점으로 만백성이 굴종적으로 살아가는 동양식 질서체제이고, 남한은 우리역사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남녀, 부자와 빈자, 출생성분 등을 뛰어넘는,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한으로 추구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으로 국가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이런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온 것은 거의 기적이었습니다. 이런 기적위에 오늘날의 경제발전이 왔고, 국제사회의 진출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 건국됨으로써 이뤄지게 된 것이지만, 어떻게 한반도에 이런 자유민주국가가 설립될 수 있었는지를 국제정치의 시각에서 조명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카이로선언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독립이 선언되었다고 배웠습니다. 카이로선언이 그냥 보통 국제선언이 아니라 2차 대전의 연합국 맹주들인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 서명한 세계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의 합의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에서 세계역사에서 거의 이름이 잊혀져버린, 아무런 국제적 후원자도 없었던 코리아가 선언의 핵심내용의 하나로 들어갔으며, 코리아는 전쟁종결과 함께 자유독립국가로 세울 것을 결의했습니다.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 스탈린 이 네 사람은 대한민국 독립의 문을 세우고, 장차 이뤄질 자유대한민국의 빛나는 영광을 향해 축배를 들었던 것입니다.(실제로 카이로 선언이 발표된 테헤란에서는 선언문 발표 전날 밤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그들의 참모들과 함께 칠면조고기를 뜯으면서 거나한 술 취함과 함께 즐거운 파티를 벌였다.)

▲ 백악관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 위 책은 정일화 지음 '카이로 선언'(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자료사진).

일본의 한국병합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너무나 세밀하고 단단한 계획으로 진행되어 기적이 아니고는 일본식민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일본이 승리한 후 맺은 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과 포츠머스 조약에 조선은 일본이 지배한다는 조항을 제1조로 넣어 조선의 허가가 있든 없든 일단 국제적으로 조선은 일본지배권으로 들어갔으며,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 그리고 미국과의 비밀협약인(일본 측 주장) 태프트-카츠라협약에서도 조선은 일본의 지배가 당연하다는 비밀협약을 얻어내고 있었다. 중국, 소련, 영국, 미국의 국제적 인정을 받은 후 일본은 조선왕조를 협박하여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나라를 이양 받는 식의 문서를 만들어 조선 땅은 영원히 일본 땅이 되는 조처를 취했다.
일본군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할 때 대한제국군대의 숫자는 7천명이었다. 무슨 수로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기적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
그 기적은 첫째 일본이 미국에 대해 칼을 던져 전쟁을 일으킨 것이고, 둘째 연합국은 일본의 어떤 항복조건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무조건 항복만 인정한다고 결정한 것(카사블랑카회담)이고, 셋째 세계 50여개의 식민지 중 유독 한국만을 지칭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 후 코리아를 자유 독립시키겠다고 카이로선언에서 선언한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은인국인 미국에 비수를 던진 것, 카사블랑카회담에서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있을 때까지 무자비하고 강력한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것, 카이로선언에서 유독 한국의 독립이 결의된 것이 코리의 독립을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기적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카이로선언의 기적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카이로선언은 그런 것이 있다는 말만 알뿐 실제로 그 원문이 어떻게 되어있으며 누가 이 선언문에 코리아의 자유 독립 구절을 넣었는지, 그것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큰 진통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우리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태프트-카츠라협약 원문을 보게 되어 조선의 멸망과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연구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일합방 문서를 우연히 인사동 헌책방에서 구입하여 본 후, 한 나라가 망한 최종문서의 내용이 너무 수치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임금과 대신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나라를 판다는 내용으로 임금과 내각총리가 서명 날인한 것을 보고 그 문서를 읽는 저도 너무 초라해 졌습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이 열릴 때쯤에는 코리아라는 이름이 거의 모든 국제무대에서 사라져 있을 때 입니다. 이때쯤 코리아를 알아주는 어떤 나라도 없었고 물론 지원국가도 없었습니다. 독립운동 조직이 여기저기에 약간은 있었지만 어떤 것도 국제기구로서나 코리아대표로서 인정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저는 1991년 소련연방이 해체되어 각 연방들이 속속 독립선언을 할 때, 백악관 뒤편의 꽤 괜찮은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 리투아니아대사관이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곳 대사를 인터뷰한 일이 있습니다.
놀라웠던 일은 리투아니아(Lituania)가 소련연방에 편입되기 전 당당한 독립국가로 있으면서 워싱턴에 번듯한 대사관 건물도 확보하고 당당한 국가로 행세했습니다. 소련연방으로 편입된 후 리투아니아대사관은 망명정부 건물로 변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대통령, 외무장관 같은 이가 망명정부를 이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난 그 리투아니아대사의 말에 의하면 건물은 쇠 빗장이 처지고, 외부와의 접촉은 매우 제한적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찾아갔을 때 자유국가의 기자로서는 아마도 첫 기자였는데, 그 대사는 당신이 한국의 특파원이라고 했는데 한국사람이라면 우리를 벌써부터 알아주고 이곳을 진즉에 찾아와야 하지 않았느냐는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나라 없는 국가의 설움이 어떤 것인가와 공식기구로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기구의 역할이 얼마나 제한적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도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직함을 찍어 미국무부에 탄원도 하고 건의도 하려했으나 코리아담당창구가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탄원서를 제출할 수가 없었으며, 억지로 제출한다고 해도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진주만공격이 있기까지 미국의 국무성과 백악관에는 친일파로 채워져 있었으며, 일본의 목소리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문서를 추적해서 얻은 기록을 바탕으로 카이로선언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중적 연구를 더 해보면 이 카이로회담에 이승만이나 다른 어떤 親한국인사들이 한국을 위해 개입했다는 증거가 나올지 모릅니다만, 아직은 그런 연구는 하지 못했습니다.
카이로회담은 태평양에서는 미국이 미드웨이해전(1942년 6월)에 승리한 후 착실히 일본본토를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고, 대서양전선은 아이젠하워의 아프리카원정군사령부가 사막의 여우 롬멜전차군단을 리비아-이집트전선에서 부신 후 1943년 초부터 유럽대륙을 향한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구상되고 있을 즈음 열렸습니다. 아프리카원정군사령관을 맡은 아이젠하워장군은 아프리카에서 작전을 끝낸 패튼장군을 일단 이탈리아상륙군으로 보내놓고 있었으나 프랑스북부를 향한 본격적인 유럽대륙상륙작전이 벌어지면 언제든지 진격방향을 돌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처칠은 여전히 프랑스 북부상륙에 대한 결정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중해를 완전히 장악해 그리스와 같은 옛 영국영향권을 회복하고, 아프리카-중동의 식민지회복이 더 우선이었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그렇게 오래 끌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이 전쟁을 대영제국의 옛 영화를 회복시키는 전쟁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백악관은 히틀러를 향한 최후작전계획을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회담을 가졌을 때,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스탈린의 참석을 희망했던 것인데 스탈린이 오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2차 대전의 마무리와 전후 질서의 구상을 위해서는 스탈린과의 협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고, 홉킨스보좌관을 통해 일단 스탈린이 회담에 나오는 것은 보장받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카사블랑카에서 멀지 않은 지중해의 어디쯤에서 11월 말경 3자회담을 하기로 하고 스탈린을 끌어내오는 책임을 처칠에게 맡겼다.
3거두회담 준비를 진행하고 있던 중 스탈린은 9월초 처칠에게 몸이 불편할 뿐 아니라, 전선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 카이로까지 못가겠으며 테헤란이면 가겠다고 말해왔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외교병(外交病)이었다. 테헤란은 당시 소련이 영국과 함께 분할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영수를 자기영토로 끌어들이는 형식으로는 만나겠다는 것이었다. 처칠은 카이로회담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 없이 미국과 영국이 먼저 카이로에서 만나 의견을 맞춘 후 테헤란으로 넘어가 스탈린을 만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처칠과의 양자회담을 더 이상 갖고 싶지 않았다. 카이로회담을 예정대로 해야 한다면 중국의 장제스를 끌어들여 3거두회담을 하고 여기서 결론된 것을 갖고 테헤란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카이로회담은 루스벨트-처칠-장제스 회담으로 이뤄졌고, 여기서 만들어진 공동선언문을 갖고 테헤란으로 넘어가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테헤란회담을 계속한 후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테헤란에서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다.(장제스는 카이로회담이 끝난 뒤 귀국했다. 테헤란회담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4명의 원수 명의로 발표된 카이로-테헤란 회담의 공동선언내용은 공동성명이 공동선언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변경되지 않았다.)

카이로회담의 공식 주제는 원래 계획되었던 대로 유럽문제였다. 유럽 상륙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미국 측 별들과 영국 측 별들이 격론을 벌였다. 장제스가 참석하는 회의에서는 버마전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토의되었으나 영국과 중국의 의견차가 많아 쉽게 결론을 맺지 못했다.
5박6일간의 회담이 이런 식으로 영국군수뇌부와 미국군수뇌부, 영국군과 중국군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면서 쉽게 결론이 날 상황이 아니었다. 스탈린을 만나러 갈 때까지 공동성명문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공동성명서 작성을 위한 공동성명기초위원회 조차도 원만하게 만들어질 것 같지 않았다.
 

처칠, 장제스, 스탈린을 직접 면대하면서 카이로-테헤란회담을 실질적으로 성사시켰던 홉킨스(루스벨트특별보좌관)는 백악관문서기록관 코넬리우스를 루스벨트가 묵고 있는 알렉산더 커크 미대사관저의 일광욕실로 불렀다. 코넬리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홉킨스는 이날 손에 어떤 서류나 메모 같은 것도 가지지 않고 일광욕실로 들어와 코넬리우스에게 카이로선언문을 구술했다.
코넬리우스 기록관은 홉킨스특별보좌관이 부르는 대로 타이프로 받아 찍었다. 내용은 첫째 일본의 잔인성을 충분히 부각시키면서 연합국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는 것, 둘째 중국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게 뺏긴 모든 영토를 반환받는다는 것, 셋째 한국은 일본에 의한 반역적인 노예생활을 벗어나 자유 독립국가가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타협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유럽상륙문제, 버마통로전쟁과 같은 군사문제와 유럽정치문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군사회담으로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선언된 것은 기적이었다. 주요의제는 군사문제였으며, 한국문제는 공식적으로 한 번도 토의된 일이 없었다.
홉킨스의 초안은 카이로에서 적어도 5번 이상 수정을 거치고 테헤란에서 다시 검토되었지만, 한국의 자유 독립의 원칙은 그대로 고수되었다.

역사에 가정을 세우는 일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조항이 들어간 것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나는 한국조항이 들어가지 못했을 경우를 상정해 보면 알 수 있다. 카이로선언이 회담개최에서부터 선언문이 발표되기까지 고비고비마다 회담진행이 꼬이는 바람에 한국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이어서 만일 이런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정상적인 군사회담으로 진행되었더라면 한국의 독립조항이 들어갈 여지는 매우 희박했다. 때문에 한국독립이 카이로선언에 들어간 것은 그만큼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a) 스탈린이 처음부터 참석한 회의였다면 한국독립은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 스탈린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었으며, 일본식민지인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여 일본의 비위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일본에 대한 도발은 곧바로 일본과의 전쟁돌입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두 개의 전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과의 서부전선 하나만으로도 벅찬 입장인데, 일본을 자극하여 만일 동부전선이 형성된다면 매우 위험한 상태로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두 개의 전선을 갖는 것은 군사전략상 가장 꺼리는 일이다.

 대신 장제스가 들어와 아시아문제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장의 역할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b) 공동코뮈니케를 위한 영국, 중국, 미국의 공식대표기구(공동코뮈니케기초위원회)가 성립되었더라면 한국독립은 들어갈 수 없었다. 처칠은 기본적으로 전후 식민지의 독립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대표가 빠지고 중국대표가 들어왔다 해도 이들 간에 원만한 회의가 진행되었더라면 공식기구를 통한 성명기초위원회가 만들어져 여기서 성명서초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한국의 독립을 과연 영국이 허락했을까 하는 강한 의문이 남는다.

c) 언론용 코뮈니케(Press Communique)나 공동성명(Communique)정도로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더라면 한국독립문제가 포츠담회담, 얄타회담, 모스크바외상회담, 유엔결의 등에서 그렇게 끈질기게 토의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선언(Declaration)은 세계인권선언과 같이 국제관계조약에서 가장 높은 위엄을 갖는 원칙이기 때문에 미 국무성은 포츠담, 얄타회담에 나가는 국제회담대표들에게 주는 회담원칙에서 제1 수칙이 되었다.

해리 홉킨스와 카이로선언과의 관계, 이승만과 홉킨스의 연관성 등은 좀 더 연구해야 할 분야입니다.
들어난 문서를 통해 홉킨스라는 인물이 왜 카이로선언에 코리아의 자유 독립을 선언문에 넣었는지는 몇 가지 합리적 추측을 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a) 처칠은 2차대전을 잃어버린 영국의 영화를 되찾는 전쟁으로 생각했지만, 루스벨트는 2차대전 개입의 정당성을 다시는 세계대전과 같은 참화를 당하지 않은 신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억압받는 국민, 강제로 나라를 뺏긴 식민지는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루스벨트의 자유독립철학을 두고 일심동체를 이루고 있던 홉킨스보좌관은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그런 민족을 보면 불같은 동정심을 갖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전기는 그런 많은 예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카이로선언을 식민지독립 원칙을 가지고 썼다면 우선은 처칠의 비위를 직접 거스르지 않고 그런 철학을 표시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었을 것이다. 한국은 영국식민지가 아닌 일본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이승만과의 연관성여부

홉킨스는 독실한 감리교신자였으며 이승만도 미국 감리교단에 많은 지원자를 갖고 있었습니다. 의회에도 감리교출신의 의원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이들과의 연관으로 홉킨스와 어떤 선이 닿았지 않나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정확한 연계성을 더 찾아봐야 합니다.
다만 이승만의 Japan Inside Out에 보면, 1940년 일리노어 루스벨트부인과 일본정부간에 심한 논쟁이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대목과 혹 연관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미국적십자총재를 맡고 있던 루스벨트여사가 한국의 기근을 위해 특별헌금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일본정부측은 한국에 기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진실게임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루스벨트여사는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부사이가 냉랭했던 루스벨트와 일리노어여사의 중간자 역할을 하고 있던 Larry Hopkins는 이 한국기근문제와 관련하여 일리노어여사와 단단한 의견일치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1940년의 한국기근을 이승만이 자기 책에서 특별히 언급한 것은 아마도 이 사건전개에 이승만 측의 정보제공이 작용했고, 이런 과정에서 홉킨스 측과 연관성을 맺었을 가능도 있습니다.

이승만의 건국과정과 카이로선언에 관해 말씀 드리면 이승만의 건국과정을 통한 노력과 열정은 카이로선언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갖고 벅차지만 전망 있는 싸움을 전개했다고 봅니다. 최남선의 독립선언은 지지자가 매우 미약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선언의 한국독립선언은 2차대전 당시 최고의 국제권력이던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선언하고 서명한 선언서입니다. 확실한 지지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건국운동은 어떤 반대세력에 대해서도 단호할 수 있었고, 그만큼 세력이 커졌다고 봅니다.
신탁통치반대운동도 소련이나 미국의 반대를 거슬러 한 운동이라고 보기보다는 미국의 지지와 미군정청의 지지를 얻어, 또는 그런 원칙을 대면서 벌인 운동이었습니다. 미국이나 미군정청은 이승만의 건국운동에 방해세력이 아니었고 지지자였으며, 그 지지자의 노력과 업적을 높이는 것이 이승만의 건국노력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자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승만 혼자서 일으킨 대한민국의 운동이 아니라, 자유민주독립을 바라는 한반도의 기독교세력, 반공세력의 지지를 갖고 전개한 것이며, 그런 깊고 광범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공화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지지층을 더 광범하게 인정하고 이 전통이 계승되어 가는 과정을 더 적절히 연구해야 이승만의 빛은 더 밝아지고 오래갈 것입니다.

이승만의 대표작인 ‘독립정신’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1904년 2월19일에 시작하여 4개월만인 그해 6월10일에 탈고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 짧은 기간에, 감옥에서, 어떻게 이렇게 방대하고 세밀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지식과 조국의 자유민주주의적 장래를 그렇게 방대한 지식으로 심오하게 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아무리 천재인 이승만이지만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독립정신을 읽으면서 이것이 감옥에 있던 자유민주주의자들의 공동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들어있는 지식과 정신에 가장 많이 공헌한 사람은 단연 감옥동지인 이상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당대 조선 최고의 자유지식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따라 1등서기관으로 미국에 가서 봉직했던 이상재였습니다. 이승만은 당대 최고의 자유지식인 그룹인 독립협회간부들과 함께 감옥생활을 했으며, 그 감옥생활동안 Appenseller, Hulbert, Gale, Avison, Bunker 등 5명의 위대한 선교사들은 성경과 총 523권의 자유민주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서적으로 매일 갖다 주면서 이들이 변하면 조선이 변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매일 감옥을 방문하여 의견을 나누고 새로운 지식을 전달했습니다. 독립협회 감옥동지 인재들은 아마도 선교사들의 말을 듣고 또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책을 돌려가면서 읽고 진지한 토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가장 권위 있던 미국시사주간지 New York Outlook, 미국헌법, 천로역정, 중동전쟁사, 청일전쟁사, 요한복음 등의 이름이 감옥동지들이 읽은 책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때 감옥동지들의 어른은 이승만보다 20살 위인 이상재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한바 있으며, 초대 주미공사관 1등서기관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워싱턴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국제적지식이 가장 많았을 것이고 또 정부와도 관계가 비교적 좋았기 때문에 아마도 감옥동지들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감옥동지들 중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들은 이상재, 이승인(이상재 아들), 김정식, 유성준(유길준 동생), 이원긍, 홍재도, 양홍목, 이승만, 박용만 등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선교사들의 말씀과 독후감을 토의하면서 너무 감동을 받은 결과 독립신문에서 글 실력을 인정받은 젊은 이승만에게 대표집필식으로 책을 쓰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유성준이 그렇게 했다고 되어 있지만 비단 유성준뿐 아니라 감옥동지들이 다 그렇게 주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일 감옥동기생들 중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나고 다른 사람들은 국내에 남아 YMCA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 교육기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민주주의사상을 뿌리내리게 하고 널리 전파하게 했습니다. 이승만이 1910년 일시 귀국할 때쯤에도 벌써 이들이 모아 놓은 한국의 기독교 세력은 엄청났습니다. 1942년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한국인이여 일어나라고 방송했을 때, 가장 큰 희망과 지지를 보낸 사람들이 바로 한성감옥 출신들이 거둔 열매이고 일꾼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반대한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전국학생총연맹 등은 자유민주주의, 자유대한을 그리는 위대한 민족그룹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이를 위해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그런 사람들, 그룹들이 바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그룹입니다. 이승만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과 꿈에 못지않게 국내에서 자란, 혹은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 자유민주주의그룹의 자유민주주에 대한 꿈과 희망은 컸던 것입니다. 이승만의 자유대한민국 건국은 이들의 지지그룹위에 선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한 사람들과 그 그룹들의 역할을 더 찾아내는 것이 이승만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이승만의 위대성은 그런 그룹위에 존재해야 꺼지지 않는 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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